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조윤(祚胤), 호는 석천(石泉). 신원경(辛原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고, 아버지는 신유정(辛有定)이다.
1402년(태종 2)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고 1408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병조판서·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처음 사관(史官)에 보임되고, 1413년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전임되어 항상 여러 대군(大君)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론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인손을 각별히 대접하여 난죽(蘭竹) 병풍을 친히 그려주었다. 이어 예조정랑에 오르고 1420년(세종 2)에 사인(舍人), 1428년에 집의(執義), 1430년에 종부시판사 겸 형조지사, 1432년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고, 곧 형조우참의,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434년에 병조좌참의가 되고 이내 승정원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38년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1444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제주도를 약탈한 왜구를 압송하여 명나라에 바치고 돌아와, 그 공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승진되었다가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45년에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고 병도 깊어 62세로 죽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못하며, 남의 과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기탄없는 말로 내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