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표직(杓直). 판이천군사(判利川郡事) 신이충(愼以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신기(愼幾)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신후갑(愼後甲)이다. 어머니는 판이천군사 구양(具揚)의 딸이다.
1459년(세조 5)에 17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세조가 대간에 등용할만한 학자를 천거하도록 명하여 사헌부에서 신자건를 천거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30세 무렵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과운(科運)이 없었다. 늙은 어버이를 생각하여 처음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의 벼슬을 하였다.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감찰·형조좌랑·상의원판관·지평(持平)·전라도도사·형조정랑·의금부경력·한성부판관·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예빈시정(禮賓寺正)·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라 중추부첨사(中樞府僉事)·장례원판결사를 지내고, 벼슬이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64세에 몸이 쇠하고 세상의 헐뜯음을 싫어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교하(交河) 심악산(深岳山) 아래 살만한 곳을 가려 정하고, 산수의 경치와 시문과 서화로 즐기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쓰고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잘 터득하였다. 성종이 글씨에 탄복하여, 창덕궁 요금문(曜金門)의 세 글자를 써 바치게 했으며, 노년에는 글씨를 청한 자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또한, 이재(吏才)에도 뛰어나 송사(訟事)를 들어 재판하는 일을 물흐르듯이 하되 모두 사리에 합당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