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전라도도사, 형조정랑, 의금부경력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표직(杓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3년(세종 25)
사망 연도
1527년(중종 22)
본관
거창(居昌)
주요 관직
전라도도사|형조정랑|의금부경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전라도도사, 형조정랑, 의금부경력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표직(杓直). 판이천군사(判利川郡事) 신이충(愼以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신기(愼幾)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신후갑(愼後甲)이다. 어머니는 판이천군사 구양(具揚)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9년(세조 5)에 17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세조가 대간에 등용할만한 학자를 천거하도록 명하여 사헌부에서 신자건를 천거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30세 무렵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과운(科運)이 없었다. 늙은 어버이를 생각하여 처음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의 벼슬을 하였다.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감찰·형조좌랑·상의원판관·지평(持平)·전라도도사·형조정랑·의금부경력·한성부판관·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예빈시정(禮賓寺正)·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라 중추부첨사(中樞府僉事)·장례원판결사를 지내고, 벼슬이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64세에 몸이 쇠하고 세상의 헐뜯음을 싫어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교하(交河) 심악산(深岳山) 아래 살만한 곳을 가려 정하고, 산수의 경치와 시문과 서화로 즐기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쓰고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잘 터득하였다. 성종이 글씨에 탄복하여, 창덕궁 요금문(曜金門)의 세 글자를 써 바치게 했으며, 노년에는 글씨를 청한 자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또한, 이재(吏才)에도 뛰어나 송사(訟事)를 들어 재판하는 일을 물흐르듯이 하되 모두 사리에 합당했다 한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사재집(思齋集)』
『패관잡기(稗官雜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