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언(幼言). 함경도사 신최(申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正言) 신의화(申儀華)이고, 아버지는 신보(申輔)이며, 어머니는 박태진(朴泰鎭)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검열·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 때에 북도(北道)에 다녀와서 과죄(科罪)를 적발하였으나 북도인 이재형(李載亨) 등 15인을 천거한 이광좌(李光佐)의 흉여당(與黨)으로 몰려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부교리·교리·지평(持平)을 거쳐, 1734년 평사(評事)로서 사행(使行)에서 일으킨 추마지설(推馬之說: 사행에 따른 말의 준비에 대한 자신의 주장)로 인하여 관직(館職: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와, 성균관의 대사성 이하의 관직) 제수가 불가하다는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 진주 겸 사은사(陳奏兼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집의(執義)·사간·교리 등 삼사를 두루 거쳤다.
사후인 1755년 흉언수작지설(凶言酬酢之說)에 연루되어 생전의 교리직을 추탈당하였으나 1764년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상소에 의하여 다시 직첩(職牒: 관원의 임명사령장)을 환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