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부수찬, 부교리,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언(幼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4년(숙종 20)
사망 연도
1738년(영조 14)
본관
평산(平山)
주요 관직
검열|부수찬|부교리|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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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부수찬, 부교리, 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언(幼言). 함경도사 신최(申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正言) 신의화(申儀華)이고, 아버지는 신보(申輔)이며, 어머니는 박태진(朴泰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검열·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 때에 북도(北道)에 다녀와서 과죄(科罪)를 적발하였으나 북도인 이재형(李載亨) 등 15인을 천거한 이광좌(李光佐)의 흉여당(與黨)으로 몰려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부교리·교리·지평(持平)을 거쳐, 1734년 평사(評事)로서 사행(使行)에서 일으킨 추마지설(推馬之說: 사행에 따른 말의 준비에 대한 자신의 주장)로 인하여 관직(館職: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와, 성균관의 대사성 이하의 관직) 제수가 불가하다는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 진주 겸 사은사(陳奏兼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집의(執義)·사간·교리 등 삼사를 두루 거쳤다.

사후인 1755년 흉언수작지설(凶言酬酢之說)에 연루되어 생전의 교리직을 추탈당하였으나 1764년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상소에 의하여 다시 직첩(職牒: 관원의 임명사령장)을 환급받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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