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는 무관의 포(袍) 위에 가슴과 등을 덮는 배자형(褙子形)의 장식을 말하였다. 중국 육조(六朝)시대에 비롯된 것으로 당나라에서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것이 다시 신라·일본에 전해졌다. 특히, 일본의 여신소상(女神塑像)에는 이 제도가 잘 보인다. 신라에는 흥덕왕 복식금제에 이 양당이 배당이라 하여 여복(女服)으로 나온다.
배당은 육두품녀는 계수금라(罽繡錦羅)·포방라(布紡羅)·야초라(野草羅)·금은니(金銀泥)를 금한다. 오두품녀는 계수금·야포라·포방라·금은니·협힐(0xFD43襭)을 금한다. 사두품녀는 다만 능(綾) 이하를 사용한다 하여 여자의 복식으로만 나오나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에는 무관의 복이 한 자락은 가슴을 가린다고 되어 있다.
한 자락은 등을 가리어 짧은 소매에 어깨를 덮는 것(裲襠之制一當胸一當背短袖覆膊)으로 되어 있다. 위의 흥덕왕 복식금제에 있는 것으로 보면 상당히 화려한 옷으로 금라(錦羅)에 계(罽)와 같은 모직물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거나 몸판에 수를 놓은 것 같으며, 금은니로 금박을 한 것 같다.
당대(唐代)의 용(傭)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도 상당히 화려한 옷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착수(窄袖)에 허리정도 길이의 배당을 받쳐입고, 긴 치마를 입고 있어 유연한 멋을 엿볼 수 있다. 당대에 여자의 조복(朝服)으로 입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전통은 도중에 끊긴 것 같다.
조선시대에 명제(明制)를 빌려 다시 단배자를 입게 되었다. 이것의 길이가 길어진 장배자(長背子)는 원삼(圓衫)으로, 단배자(短背子)는 숙종 때에 오늘의 당의가 되어 우리 복식의 아름다운 전형으로 고정된 것 같다. 이 당의는 조선 후기에 소례복(小禮服)으로 내외명부가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