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 거사비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명지대학교 교정에 있는 조선후기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장수 양호에 관한 송덕비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파견된 명나라의 장수 양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방형대석 위에 화강암의 비신과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된 이수를 갖춘 통비이다. 1598년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의 위패를 모신 선무사를 세우면서 이 비석도 세웠다. 1604년 선무사에 양호의 위패도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모셨으므로 생사당이라고 불렸다. 1835년 불이 나서 훼손되자 이전의 비문을 모각하여 다시 세운 비석이다.
199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비는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선무사(宣武祠) 자리에 있었으며, 1970년대 초 명지대학교가 서소문동에서 남가좌동으로 이전할 때 같이 옮겨왔다. 1993년 4월 3일에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학교법인 명지학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는 방형대석(方形臺石) 위에 화강암의 비신과 이수(螭首)를 갖춘 통비이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서로 다투는 형상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총 높이는 248㎝, 비신의 높이는 172㎝, 폭은 67㎝, 두께는 22㎝이다.
비 전면의 상단에 ‘흠차경리조선도어사양공거사비(欽差經理朝鮮都御史楊公去思碑)’라고 세로 2행 14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아래 우측으로부터 세로 7행 73자로 양호의 출신지 · 관직 · 업적 및 비를 세우는 뜻을 기록하였다. 이를 양공거사비 또는 비문의 끝글자를 따서 양공타루비(楊公墮淚碑)라고 전해온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공이 많았던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의 위패를 모신 선무사를 세우면서 그 해 8월에 양호거사비를 이곳에 세웠다. 1604년(선조 37) 양호의 위패도 선무사에 같이 모셨으며,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살아있는 사람을 모셨으므로 생사당(生祠堂)이라 불렸다.
그 뒤 1764년(영조 40) 왕이 선무사에 나아가 제향을 지낸 뒤 비의 훼손을 염려해 다시 7척 높이의 새로운 비를 선무사 앞뜰에 세우고, 먼저 사현(沙峴 : 무악재)에 있던 양공거사비를 이곳에 옮겨오게 하였다.
사현에 있던 비는 1610년(광해군 2) 양호의 초상화를 중국에서 구해와 선무사에 걸면서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 김상용(金尙容)이 두전(頭篆)했으며, 지돈녕부사 김현성(金玄成)이 글을 쓴 것으로 또하나의 ‘경리조선군첨도어사양공거사비’로 모화관 동쪽 언덕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1835년(헌종 1)에 불이나 훼손되어 비문을 읽을 수가 없게 되어 이전의 비문을 모각해 다시 세웠다. 이 때 음기는 홍문관대제학 신재식(申在植)이 짓고, 호군 신위(申緯)가 썼다. 이 비는 총높이 266㎝, 비신높이 234㎝, 폭 98㎝, 두께 32.5㎝이며, 최근에 독립문사거리 근처의 공사중에 발견되어 종로구 행촌동 대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양호의 행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의 전쟁 상황이 평양전투와 벽제관전투, 행주대첩 등을 거치면서 화의가 진행되며 소강상태에 빠지고 왜군이 경상도 일대로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 20만의 왜군이 재침해 경남 해안과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 때 명나라의 신종(神宗)은 1597년 1월 형개를 총독으로, 양호를 도찰원우도첨어사 경리조선군무로 삼은 뒤 군사 5만의 원군을 조선으로 보냈다. 양호는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해 선발대로 보낸 조명(朝明) 연합군이 8월 4일 남원성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양호는 9월 3일 서울에 입성한 뒤 남산에 올라 군령을 포고하고 선조 임금을 모시고 동작진(銅雀津)을 건너 연합군의 전투준비상태를 살펴보았다. 이어 9월 7일 직산에 나타난 왜군을 선봉에 서서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남원성을 탈환, 조령고개를 넘어 의성 · 경주에 나갔다. 이 때는 도원수 권율의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12월 22일 예하의 마귀 · 양원장군과 함께 반구정과 태화강의 적진을 공격해 왜장 가토[加藤靑正]를 단신으로 도산(島山)까지 도망가게 하였다. 이듬 해 1월 울산성을 수차 공격하고 장기전으로 고전하던 중 도요토미[豊神秀吉]가 사망하고 왜군이 물러나자 7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이 때 양호는 그의 부하였던 군교(軍校)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파직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자 조선 정부에서는 그에게 무훈장군이라는 칭호를 준 뒤 그의 높은 공을 찬양해 잘못된 무고임을 알리자 명나라에서는 양호를 재등용해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