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전쟁 ()

고대사
사건
598년(영양왕 9)부터 614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와의 전쟁.
이칭
이칭
고수전쟁
정의
598년(영양왕 9)부터 614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와의 전쟁.
역사적 배경

전쟁의 원인은 수의 대외적인 팽창 정책에 있었다. 581년(평원왕 23)에 건국된 수는 돌궐(突厥)을 격파하고, 이어 589년에 남중국의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써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에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그 전 시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5세기 중반 이래 동아시아는 중국의 남북조,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유연(柔然)과 이를 이은 돌궐, 티베트 고원 서북 지역의 토욕혼(吐浴渾), 동북 아시아 지역의 고구려 등 주요한 몇몇 국가들을 중심으로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장기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중국 왕조 간에는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며 공존하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은 기존의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이었다.

수는 동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여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 아래 돌궐을 격파하고 진(陳)을 멸망시킨 수의 차기 침공 대상은 당연히 고구려였다. 진이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구려가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다.

수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부정하고 수에 복속할 것을 강요하였다. 수의 세력이 점차 동북 아시아 방면으로 뻗치자, 고구려 휘하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의 일부가 그 영향력에 끌려 수 쪽으로 이탈해갔다. 이런 양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속화되었고 고구려 제국의 해체를 몰고 올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수에 복속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의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고구려는 후자를 택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기존의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측과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측 간의 대결이었다. 따라서 이는 양국의 운명을 건 숙명적인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전쟁은 598년, 요서(遼西)지방에 설치된 수의 전진 기지에 대한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에 수의 문제(文帝)는 30만이라는 대병을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에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군의 반격과 질병 등으로 패배, 퇴각하였다. 이어 양제(煬帝)가 재차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여 수의 북쪽 국경을 압박하려는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돌궐은 이미 수에 복속된 상태였으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정책이 아니더라도,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의 제패를 추구하는 수 제국에게는 걸림돌이었다.

612년 정월, 마침내 수의 양제는 육군 113만과 해군 4만을 직접 이끌고 대규모의 침공을 감행하였다. 여기에, 보급물자를 운반하기 위하여 동원된 인원은 전투병 수의 배에 달하였다. 이는 그 시기까지 세계 역사상 동원된 병력 규모 중 최대였다.

수의 침공군을 맞아 고구려군은 요하(遼河)에서 적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벌였으나 여의치 않자, 성 지키기 작전에 주력하였다. 이는, 평원에서 대규모로 적군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은 피하고, 들판에 있는 물자를 태워버린 뒤 주요 성들을 지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적의 전진을 막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소규모 부대를 동원하여 적을 교란하고 적의 긴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요동성(遼東城) 등의 주요 거점을 함락할 수 없어 전진이 쉽지 않은 데다, 100만이 넘는 원정군에 필요한 군수물자 운반의 어려움이 더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군 지휘부는 초조해졌다.

특히, 다가오는 추운 계절이 원정군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으므로, 양제는 중간에 있는 성들을 미루어두고, 정예 부대 30만이 곧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는 속전속결책을 취하였다. 일단 평양성에 도달하면,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수의 해군과 연합하여 수도를 공략하려는 계책이었다.

우문술(宇文述)ㆍ우중문(于仲文) 등이 이끄는 수의 30만 별동군을 맞이하여, 고구려군의 사령관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들과 정면 대결하지 않고 수도 가까이까지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적군에게 휴식을 주지 않기 위하여 계속 전투를 벌이다 후퇴하고 다시 공격하다가 거짓 패퇴하며 유인하였다.

승승장구하며 평양성 부근에 도달하기는 하였으나, 수군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후방기지와의 보급선은 차단된 상태였다. 수의 해군은 그 전에 이미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였기 때문에 해군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도 없었다.

고립무원에 빠진 것을 알고 후퇴하는 침공군을 고구려군은 뒤쪽에서 공격해 나가다가 살수(薩水)에서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불과 수천 명 정도가 요동의 본진에 돌아갈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의 양제는 전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인 613년 4월, 수의 양제는 다시 고구려에 침공해 왔다. 전쟁 양상은 지난해와 비슷하여 수군은 요동성ㆍ신성(新城) 일대에서 저지되었다. 그러던 중 수군의 군수물자조달 총책임을 맡고 있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수군은 급히 퇴각하게 되었고 이를 공격한 고구려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수의 양제는 이듬해인 614년에 또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고구려 원정의 패배로 인하여 엄청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은 수의 농민들이 양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봉기하는 등 수의 국내정세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으므로 병력동원도 여의치 않았다. 고구려측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피폐한 상태였으므로, 양국 간에는 화의가 성립되어 수군은 철퇴하였다.

결과

615년에도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수의 약화를 틈타 강성해진 돌궐이 수를 위협하는 형세였으므로, 고구려 원정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미 수 제국 자체가 무너져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618년(영류왕 1)에 양제가 피살됨에 따라 수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한편, 여수전쟁 기간 중 신라와 백제는 수에 고구려 원정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는 등 짐짓 외교적으로는 수를 지원하였으나, 실제 전쟁의 전개에서는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십여 년에 걸친 고구려와 수와의 전쟁이 끝난 뒤, 수 제국은 고구려 원정 실패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멸망하고 중국은 다시 당분간 분열상을 나타내었다.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들은 세력을 회복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반도 내의 삼국 간에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수서(隋書)』
『고구려대수당전쟁사(高句麗對隋唐戰爭史)』(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5∼6세기 동(東)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노태돈, 『동방학지(東方學志)』44, 1984)
집필자
노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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