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천비(泉毖), 자는 맹견(孟堅)으로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이다.
고조는 연개소문, 증조는 연남생(淵男生, 泉男生), 조부는 연헌성(淵獻誠, 泉獻誠)이고, 아버지는 연은(淵隱, 泉隱 또는 泉玄隱)이다. 또 외조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당나라 경조부(京兆府)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연씨 일문이 당나라에 망명한 뒤 ‘경조(京兆)’에 편적(編籍)되어 이곳을 본관으로 했기 때문이다.
증조 천남생이 당나라에 망명하여 고위관직을 받았고, 조부와 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 조정에서 이어 활동하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겨우 2세의 나이인 709년에 치천현 개국남(淄川縣開國男)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인 치천자(淄川子)로 진봉(進封)되어 식읍 400호를 받았다.
다시 효기위(驍騎尉)를 제수받고 음보(蔭補)로 태묘재랑(太廟齋郞)에 임명되었다가 선덕랑(宣德郞)에 올랐으며, 얼마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뛰어나고 강학(강학)에 힘써 학문이 우수했으며, 병서와 방술(方術)에도 능통하였다.
729년 9월에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733년 낙양현(洛陽縣)의 구영(舊塋)으로 이장되었다. 이러한 그의 일생은 아버지인 천은이 지은 「당고선덕랑효기위치천현개국자천군지명(唐故宣德郞驍騎尉淄川縣開國子泉君誌銘」(일명 천비 묘지명)에 의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