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당시의 장수.
생애 / 활동사항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의 서울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으나 군량이 떨어져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김유신을 시켜 쌀 4,000석과 벼[租] 2만 2,250석을 당군에 보급하도록 하였다.
당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항쟁하는 신라로서는 당군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와 같은 것이었다. 군량을 실은 신라 군사는 온갖 지세의 험난함을 무릅쓰고 장새(獐塞: 지금의 황해도 수안)에 이르렀으나, 혹심한 추위로 군사와 말이 많이 얼어 죽고 피로하여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기 쉬워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하루빨리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왔음을 알려야 하였다. 그 때 보기감(步騎監) 보행(輔行: 副使)으로 있던 열기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군사(軍師) 구근(仇近) 등 15명과 함께 적지를 가로질러 이틀 만에 소정방에게 이르러 사명을 전하고 그 회신을 받아 다시 이틀 만에 군진으로 돌아왔다.
김유신은 그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級飡)의 벼슬을 주었다. 떠나기에 앞서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국경을 넘은 뒤에 상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 다시 왕에게 주청하여 열기에게 한 등급 위인 사찬을 주도록 하여 그의 공로를 높이 드러냈다. 열기는 김유신이 죽은 뒤에도 정권을 잡은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의 후원으로 삼년산군(三年山郡: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통일전쟁사』(노태돈,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
- 「7세기 삼국통일전쟁과 신라의 군사활동」(강종훈, 『신라문화』24, 2004)
- 「신라 삼국 통일의 연구」(문경현, 『경북사학』19, 1996)
- 『신라 골품제 사회(新羅 骨品制 社會)와 화랑도(花郞徒)』(이기동, 일조각(一潮閣),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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