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은 일반국제법상 당연히 인정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머무르는 나라의 재판관할권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종래에는 일부 국가에서 외국인에 관한 재판을 그 본국의 영사나 기타 관리에게 허용하였는데, 이것은 보통 우호통상항해조약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유럽의 선진 기독교국가에 의하여 후진 비기독교국가에서 행하여졌으며, 16세기 터키에서 행한 것이 그 효시이다.
각국이 자기 나라 영토에서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관할권을 행사한다는 근대국가의 주권개념에서 볼 때 이것은 주권의 제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구국가의 경제적 이익추구와 기독교전파를 용이하게 하였다.
동양에서는 중국이 1843년 오구통상장정(五口通商章程)에서 영국에 형사사건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이듬해 미국에 민사사건의 영사재판권까지 허용하게 되어, 각국이 민사·형사상 영사재판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1855년 러일조약에서 쌍무적인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였으나, 같은 해 네덜란드와의 통상예비조약에서 일방적인 영사재판권을 허용하였다.
1876년(고종 13)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서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 재류중, 만약 죄과를 범하여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의한다.”는 일방적인 영사재판권을 허용하였다.
그 뒤 1882년 미국과의 조약에서도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였으나, 조선의 법령과 재판절차가 개혁되어 미국의 법령 및 재판절차와 일치된다고 판단될 때 철폐할 수 있다는 단서를 첨부함으로써 철폐가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앞서의 단서조항을 삭제하여 영사재판권을 허용해주었고, 이것은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와의 조약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영사재판권은 조선 말기까지 서양·청·일본인 등의 활동의 법적 보장이 되었는데, 우리 나라는 청나라의 종주권행사와 일본의 적극적인 대한정책으로 더욱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된 과정에서 실시된 영사재판권은 19세기 말부터 쇠퇴하여 제2차대전 중에 완전히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