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 동경성 ( )

선사문화
유적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에 있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성곽. 성곽터.
이칭
이칭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상경성(上京城), 홀한성(忽汗城), 천복성(天福城)
내용 요약

영안 동경성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발해진에 있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성곽터이다. 이 성은 발해 제3대 문왕(文王)때 천도한 곳이다. 성은 외성(外城)·궁성(宮城)·황성(皇城)으로 이뤄졌으며, 계획도시로서 성벽은 서로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며, 성문도 일직선으로 연결된다. 외성 밖에는 해자가 있고, 궁성은 외성의 북쪽 한복판에 있으며 황성은 궁성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경성에는 성문, 궁전지, 관청지, 절터, 정원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중국은 동경성을 단독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

정의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에 있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성곽. 성곽터.
개설

영안시(寧安市)에서 서남쪽으로 약 35㎞ 가면 동경성진(東京城鎭)에 이르는데, 성은 이 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있다. 성 안에는 발해진을 비롯하여 6개의 마을이 있다. 성터는 주위가 수백 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에 있다.

성 남쪽에는 홀한해(忽汗海), 즉 경박호(鏡泊湖)가 있다.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홀한하(忽汗河), 즉 목단강(牧丹江)은 성의 남쪽과 동쪽 및 북쪽의 성벽 밖으로 감돌아 흐른다. 목단강과 성의 북벽 사이에 경치가 좋은 발해포(渤海浦)가 있는데, 이 호수 안에는 섬들이 드물게 보인다. 발해시기의 기와파편과 주춧돌이 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 정자를 지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 부근에는 대목단둔성(大牡丹屯城) · 우장성(牛場城) · 승리촌고성보(勝利村古城堡) 등의 성터와 평안교(平安橋) · 칠공교(七孔橋) · 오공교(五孔橋)의 다리유적, 대주둔(大朱屯) · 삼령둔(三靈屯) · 대목단둔(大牡丹屯) 등에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 변천

동경성은 발해진의 옛명이고 발해국 수도 상경용천부의 옛터이다. 발해는 도합 229년의 역사에서 4차례 도읍을 옮긴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모든 도읍은 사실상 제3대 문왕(文王, 737∼793) 때 차례로 기획 · 건설되었으며, 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동경성은 발해 시기에 ‘홀한성(忽汗城)’이라고 했고, 동단국 시기엔 ‘천복성(天福城)’이라고 불렀다. 중화민국시기엔 동경성을 ‘동대와자’라 불렀고, 일제시대엔 ‘동경성보(東京城保)’라고 하다가 후에는 ‘동경성가’라 불렀으며, 광복 후에는 ‘세환진(世環鎭)’이라 개칭했으며, 1956년에 드디어 ‘동경성진’으로 고쳐 불렀다.

내용

성터는 1933∼1934년에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발굴하였다. 그 뒤 1963∼1964년에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가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성은 외성(外城) · 궁성(宮城) · 황성(皇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경성의 평면도에서 볼 수 있듯이 동경성은 철저한 계획도시이다. 외성 · 궁성 · 황성으로 이루어진 3겹의 성벽은 서로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며, 성문도 일직선으로 연결된다. 다만 성벽의 축조시점은 조금 달라서 처음에 황성과 궁성이 함께 축조되고, 나중에 궁성의 북벽을 확장하면서 외성 축조가 뒤따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외성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성벽은 안쪽을 돌로 쌓고 그 외부에는 흙을 덮었는데,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부분은 높이가 3m에 달한다. 외성의 총 둘레는 1만 6,296.5m로서 40리가 넘는다.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로 모두 직선이고, 북벽은 철(凸)자형으로 4,946m이다.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는데, 동서 2벽에 각기 2개, 남북 2벽에 각기 3개씩 있다.

외성 밖에는 해자가 있다. 성은 주1를 기준으로 동반성(東半城)과 서반성(西半城)으로 나뉘며, 길이 바둑판모양으로 나있어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각 구역 안에는 주민들이 살던 집과 절 · 시장 등이 있던 이방(里坊)이 있다. 서반성 이방은 41개로 큰 것이 9개, 작은 것이 32개이다. 동반성에도 자세하지는 않지만 40여 개의 이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성은 장방형으로 외성의 북쪽 한복판에 있다. 둘레는 3,986m이며, 동벽은 900m, 남벽은 1,050m, 서벽은 940m, 북벽은 1,096m이다. 궁성은 중심구역 · 북쪽구역 · 동쪽구역 · 서쪽구역 등의 4개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궁성 외벽과 각 구역의 벽은 모두 외성벽처럼 쌓았는데, 현존 높이는 3∼4m이다. 동쪽 구역에는 연못 · 인공산 · 팔각정 · 문지(門址)가 있고, 중심구역에는 7개의 궁전지(宮殿址) 가 있다. 그 중 제1∼5 궁전지는 『영안현지(寧安縣誌)』에 오중전(五重殿)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궁전은 모두 회랑(廻廊)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황성은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서가 긴 장방형이다. 성벽의 축조법은 궁성의 경우와 같다. 동쪽 길이가 447m, 남쪽 길이가 1,045m, 서쪽 길이가 454m, 북쪽 길이가 1,050m이다. 이 곳에는 동문 · 서문 · 남문의 3개문이 있고, 동쪽 구역 · 서쪽 구역 · 중심 구역의 3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곳에서 10개의 관청지(官廳址)가 나타나 그 일부가 발굴되었다. 이 곳에 3성 6부(三省六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특징

동경성에는 당시에 세웠던 건축물의 유지(遺址)가 지금도 있다. 종류별로 보면 성문 · 궁전 · 관청 · 절 · 정원 및 우물터 등이다.

성문은 모두 16개가 있었는데, 외성에 10개, 궁성에 3개, 황성에 3개가 있다. 여러 성문 중에서 외성의 남북벽의 가운데 문과 궁성 남문 및 황성 남문들은 문길이 3개씩 있는 큰 문이고, 나머지는 문길이 하나인 작은 문이다. 성문들은 놓인 위치와 역할에 따라 구조를 달리하였다. 첫째 형식은 문루를 성벽 사이의 땅 위에 세운 것이고, 둘째 형식은 문루를 성벽 위에 세운 것이며, 셋째 형식은 높은 기단 위에 문루를 세운 것이다.

궁성의 중심 구역에서만도 37개의 각종 궁전지와 유적이 알려졌다. 궁전지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중심구역에 남북으로 줄지어 늘어선 5개의 궁전지이다. 이 중 제1 · 2 · 5궁전은 당시 조회(朝會)나 예식(禮式)이 행해지던 곳으로 제일 앞쪽과 뒤쪽에 있다. 제3 · 4 궁전은 왕이나 그 측근자들이 일상적으로 쉬던 곳, 즉 침전(寢殿)인데, 제4궁전과 궁성 서쪽구역에서 온돌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 주거용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황성 동쪽구역에는 여러 관청지가 있다. 그리고 10여 개의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2개가 성 밖에 있다. 또한 궁성의 동쪽구역에는 정원지가 있다. 이 구역은 남북 길이 720m, 동서 너비 213m이다.

구역의 북쪽에는 벽에 둘러싸인 작은 뜰이 여러 개 있고, 그 남쪽에는 연못을 판 후 인공의 산을 만들었으며 정자(亭子)와 누(樓)를 지어 풍취를 돋우었다. 우물은 궁성에서 1개, 외성에서 3 · 4개가 알려졌다. 그 중 보존상태가 좋은 것은 궁성 안의 것으로 『영안현지』에는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동경성은 1961년 중점문물보호단위(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현재 영안시문물관리소(寧安市文物管理所)가 관리를 하고 있다. 2006년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하였다. 동경성은 그 터가 워낙 넓기 때문에 전체발굴은 하지 못하고 지표면만 정리해 놓은 상태이다. 동경성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였는데, 궁성 정문터의 경우 발해 양식이 아닌 당나라 양식으로 지어놓았다고 한다. 궁성 내부에는 옥수수를 경작하는 등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안현지(寧安縣誌)』
「발해도성(渤海都城)과 신라왕경(新羅王京)의 비교(比較)」(김진광·강현숙,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제29집, 2008)
「발해의 상경 건설과 천도」(김기섭·김진광,『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45, 2007)
「발해국 수도의 옛터·동경성」(류연산, 『북한』 통권 제363호, 2002)
「발해국 수도의 옛터·동경성」(류연산, 『북한』 통권 제362호, 2002)
「발해수도 동경성 기행」(이금전, 『역사비평』 통권 20호, 1992)
주석
주1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에 있던 큰 도로. 궁성의 남문과 외성의 남문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도로로, 중국 당나라의 장안성에 있던 도로를 모방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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