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영은문의 주춧돌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맞았던 객관(客館)으로, 1407년(태종 7)에 처음 건립되어 ‘모화루’로 불렸다. 그 뒤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고쳐 불리고는 그 앞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1537년(중종 32)에 홍살문을 대신하여 보다 격식을 갖춘 영은문을 건립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을 ‘영조(迎詔)’라고 불렀지만, 1606년(선조 39)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주장에 따라 ‘영은’으로 바뀌었다. 다만 현재 전하는 서울의 고지도에는 ‘연주문(延柱門)’, ‘연은문(延恩門)’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896년(건양 1)에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거론되어 헐렸는데, 뒤쪽에 새로 독립문(獨立門)이 건립되면서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1934년에는 남쪽으로 약간 옮겨 졌고, 1979년에는 성산대로와 금화터널을 개설하면서, 독립문과 함께 서북쪽으로 약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옮겨 세웠다.
『중종실록』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2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의 문으로 건립하였는데, 지붕에는 푸른색 기와가 덮였다고 전한다. 철거되기 이전에 찍은 사진에도, 2기의 긴 주춧돌 위에 두리 기둥을 올리고, 기둥 머리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얹은 뒤 평방 위에 공포(栱包) 6구(具)를 결구하였으며, 공포 위에 겹처마의 우진각 지붕을 놓은 모습이다. 아울러 지붕의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발랐는데, 그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를 놓았으며, 우진각 지붕의 추녀마루에도 잡상을 얹었다. 또한 양쪽 기둥에는 꽃 무늬를 연이어 새긴 낙양을 달고서 그 가운데 부분에 편액(扁額)을 달았다.
현재 남아 있는 2기의 주춧돌은 2단의 받침돌 위에 긴 기둥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곧 네모난 아래바닥돌 위에 있는 네모난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2구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의 긴 기둥은 단면 4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