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주(春州)사람이며, 아버지는 대광(大匡) 왕유(王柔)이다. 왕유는 원래 박씨(朴氏)였으나 태조로부터 왕씨(王氏) 성(姓)을 받았으며, 이름은 왕유(王儒)로도 쓰였다.
왕유는 성격이 곧고 유학에 능통하여 궁예(弓裔) 정권 아래에서 동궁기실(東宮記室)이 되었으나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출가하였다. 산곡 간에 숨어 있다가 태조가 즉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려오니 태조가 예로써 대접하여 행정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文士層),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
왕유의 딸이 태조의 왕비가 된 것은 바로 왕유의 문필가로서의 활동이 태조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다 출신지 춘주는 개경에서 강원도로 가는 교통로의 요충으로 태백산 이서(以西)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할 수 있는 요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궁예(弓裔)가 세웠던 태봉(泰封)의 수도가 철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철원과 근접하면서도 이 지역과 대결할 수 있는 지방세력과의 제휴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춘주는 이러한 여러 목적에 합당한 지역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