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 1892년부터 1895년부터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이후(李厚)서당에서 본격적으로 한학에 열중했다. 1896년 내부 주사로 등용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몇 달 뒤 사직하고 1896년 10월 배재학당에 입학, 1900년 졸업했다. 배재학당 재학중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1898년에는 협성회 기관지인 『협성회보』 창간위원으로 활동했다. 1902년 미국인 선교사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미국 켄터키주의 센트럴대학에 입학했다. 1904년에 루이빌의고대학으로 편입, 1907년 졸업한 후 잠시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10월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인 1907년 11월부터 전북 군산야소교병원장이 되었고, 1909년에는 군산에 영명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1910년 봄 전남 광주야소교병원장, 1911년 전남 목포야소교병원장이 되었다. 1912년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에 임용되었으나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 교수 제한조치에 따라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연구했다. 귀국 직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피부과 과장이 되었으며, 1919년 1월 윤치호 등과 함께 경성고아구제회를 조직하고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다. 1921년 3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감이 되었으며, 4월에는 친일단체인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이 되었다. 1923년부터 경성부협의원, 서대문금융조합장으로 활동했고, 1924년 4월에는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한 동민회(同民會)에 참여했고, 1925년부터는 평의원이 되었다. 1929년 9월부터 약 1년간 세계를 여행했으며,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교육회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1934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1935년에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이사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 되었고,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축하회를 발기했고,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1939년 2월에는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 5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임이사,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이사를 맡았다. 1941년에는 흥아보국단 경기도위원,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 되었다. 매일신보사 등 일제의 관변 언론이나 단체에서 주관한 간담회에 참여하거나, 기고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에는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1946년 5월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해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1963년 5월 18일 사망했다.
오긍선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5·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06∼14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사회사업공로표창(1949), 정부 공익표창(1962),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1963), 문화훈장(1963)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