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 ()

목차
원불교
단체
원불교의 초기 조직.
목차
정의
원불교의 초기 조직.
내용

불법연구회는 1948년 4월 '원불교'라는 교명이 선포되기까지 교단을 지칭하던 명칭이다. 교조 소태산(少太山, 본명 朴重彬)은 1891년생으로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에 어떤 스승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입정 상태에서 대각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날은 현재 원불교에서 개교기념일로 제정, 기념하고 있다.

1917년 소태산은 그의 고향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에서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금주·금연·소비절약·공동노역 등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소태산은 1919년 10월 불법연구회기성조합(佛法硏究會期成組合)으로 개칭하고, 모든 기록의 명칭에 ‘불법(佛法)’을 사용하게 했으며, 나아가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를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는 선언을 하였다.

1924년 4월 소태산은 제자들과 함께 교단공개의 터전을 전라북도 이리(지금의 익산) 근교로 정했다.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교단을 공개하였다.

총회에서 채택된 규약에 따라 소태산이 총재에 추대되고 서중안(徐中安)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해 9월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지금의 익산시 신룡동)에 총부를 건설하였다.

소태산은 교단 창립한도를 1회 12년씩 3회 36년을 제1대로 정하고 교단발전 3단계계획을 세웠다. 1회 12년은 교단창립의 정신적·경제적 기초확립, 2회 12년은 교법제정과 편성, 3회 12년은 인재양성과 포교에 주력하는 기간으로 정하였다.

1단계에서는 근검저축·금주금연·허례폐지·미신타파·시미(匙米:일종의 헌금)장려·공동노역 등을 통한 저축운동과 간석지 개간으로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이리에 총부를 건설한 뒤로는 상조조합을 운영하고, 산업부를 창설,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원과 양잠 등을 시작했다.

또 한약방을 개설하는 등 ‘영육쌍전(靈肉雙全)’과 ‘이사병행(理事竝行)’으로 경제기반을 구축하여 나갔다. 1919년 10월 소태산은 전라북도 부안군 실상사 부근에 휴양소를 정하고 휴양 겸 교법제정에 착수하였다.

1920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삼학팔조(三學八條)의 교강 발표, 이어 ≪불법연구회취지규약≫·≪수양연구요론≫·≪월말통신≫·≪회보≫·≪보경육대요령≫·≪조선불교혁신론≫을 발간하였다. 1943년에는 기본경전인 ≪정전 正典≫을 결집, 완성하였다.

3단계는 1924년 5월 전라북도 진안군 만덕산에서 최초 정기훈련을 실시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함과 동시에 동선(冬禪)·하선(夏禪) 등의 훈련을 통한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1946년에는 유일학림(唯一學林:지금의 원광대학교·원광중고등학교 전신)으로 발전하였다.

1943년 6월 소태산이 열반에 들자, 송규(宋奎) 종법사가 그 뒤를 이었으며, 1948년에 가서 교단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

참고문헌

『원불교교사』(정화사, 1975)
『소태산대종사』(손정윤, 원불교출판사, 1975)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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