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재(約齋) 류상운(柳尙運, 1636~1707)은 본관이 문화(文化),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또는 누실(陋室)로 1660년(현종 1)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6년(현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이후 우참찬을 지내고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삭직되었고 희빈 장씨의 처리 문제로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노소가 분리할 때 윤증(尹拯) · 박세채(朴世采) 등과 입장을 같이 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해 시문과 금석문이 남아 있다.
그의 문집은 본집 5책으로 편성되었으며, 후대에 후손이 별책으로 편찬한 「약재연보」1책을 포함하여 모두 6책으로 성책되어 목판에 판각하여 인쇄하기 위해 정서해 놓은 초고본(草稿本)이다. 본집은 권차가 구분되지 않은 5책으로 편성되었으나, 일부에 권차가 매겨져 있고 부분적으로 수정된 것으로 보아 후손에 의해 보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유상운의 문집은 18세기 전반에 저자가 직접 작성한 초고본으로, 지금까지 다른 전사본(轉寫本)이 없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2011년 3월 8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일괄 지정되었다.
초고본에는 목록이나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노론계가 집권한 이후 대부분의 소론계 인물들의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였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저자 류상운은 자신은 물론이고, 소론 대신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류봉휘의 아버지로 소론계 집안이다. 따라서 영의정을 지낸 저자의 문집이 간행되기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집은 권차를 비롯하여 곳곳에 수정한 흔적이 있다. 또 다른 필체로 쓴 시문이 추가된 것으로 보아, 간행을 염두에 두고 해정하게 정서했다가 끝내 간행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초고본은 저자가 직접 편집하여 후손에 전래된 유일본으로 표지, 장황, 지질, 필서 상태 등을 보아 18세기 전반 무렵에 성책된 것으로 보인다.
초고본은 본집인 『약재집』5책과 『약재연보』1책 등 모두 필사본 6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집은 10행 20자로 크기는 20.9×14.5㎝이며, 별책 연보는 15행 25자로 배치되었다.
초고본 『약재집』은 본집 5책과 『약재연보』1책 등 모두 6책으로 편찬되었는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1~3은 시집(詩集)으로서, 시문을 지은 시대 순서로 성편하였다. 책1의「서암록(西巖錄)」은 1659년(효종 10)부터 1666년(현종 7)까지 서울에 있거나 광주(廣州) 율현촌(栗峴村)에 우거하던 시절에 스스로 ‘서암(西巖)’이라 자호한데서 비롯되었다.
「영남록(嶺南錄)」은 1671년(현종 12) 경상 도사를 지낼 때의 시작을 모아놓은 것이며, 「청원록(淸源錄)」은 1676년(숙종 2) 별호가 청원인 강계 부사로 있을 때에 지은 작품이다. 「관서록(關西錄)」은 1680년(숙종 6)과 1684년(숙종 10) 두 차례에 걸쳐 평안 감사로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책2의 「연행록(燕行錄)」은 1682년(숙종 8)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올 때까지 견문한 내용과 수창(酬唱)한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파릉록(巴陵錄)」은 1686년(숙종 12)에 양천에 우거할 때 지은 것인데, 이중 ‘상(霜)’ 이하부터 ‘한중 우음(閑中偶吟)’까지의 14수는 「광릉록」에 들어간다고 주기되어있다.
책3의 「북정록(北征錄)」은 시관으로 길주(吉州)에 파견되어 시험을 주관하고 함흥에서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시이다. 「광릉록(廣陵錄)」은 1687년(숙종 13) 공조 판서로서 광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가 9월 4일 이후 능행한 일을 읊은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두 번째 「광릉록」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삭출되어 율리로 돌아와 우거하면서 지은 것이다. 「검암록(黔巖錄)」은 1691년(숙종 17) 5월 16일 광주 율리를 출발하여 천안 수촌(水村)으로 친구의 별장을 빌려 우거하던 때와 뒤에 천안 소동면(小東面) 검암(黔巖)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지은 시들이다. 「수집록(搜輯錄)」은 여기저기에서 수집한 것을 모은 시이며, 「사산록(蛇山錄)」은 1702년(숙종 28) 직산(稷山)에 유배되어 사산(蛇山)에 우거하던 때와 그 이후에 지어진 시들인데, 1703년(숙종 29) 이후의 시들은 광주에서 지은 것이므로 「광릉록」이 된다고 주기되어 있다.
책4는 소차(疏箚)이다. 대부분 사직상소로 대사간, 호조와 이조의 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사직한다는 내용인데, 이 가운데 1701년(숙종 27)에 올린 ‘진소회소(陳所懷疏)’는 장희빈에게 사약의 명이 내려지자, 왕세자를 위해서 선처해줄 것을 간청한 내용이다.
책5는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시장(諡狀). 제문(祭文), 기(記)이다. 행장은 신익상에 대한 것이고, 묘지명은 이오와 이적길 등에 대한 것이며, 시장은 이기조에 대한 것이다. 제문은 스승인 박세채와 이성령 등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책6은 문집과는 별책으로 되어 있는 「약재연보」와 「기연유적(耆筵遺蹟)」은 필체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지은 것이다. 연보의 말미에 1956년 저자의 8대손 류기혁(柳起赫)이 가승(家乘)과 묘도문(墓道文)에서 발췌하여 보충해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 류상운은 숙종 때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영의정에 오른 소론계 인물로 목판으로 간행한 문집은 없이 정서한 초고본만 유일하게 남아 있어 가치가 높다. 이 초고본은 한 사람의 해정한 서체로 일관되게 쓰여 있으며, 일부 교정과 편집의 흔적도 남아 있어 향후 목판으로 간행하기 위해 만든 정서본으로 보인다. 비록 초고본이라고 하지만, 거의 완전한 문집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분량도 5책으로 그 내용이 적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시문을 저자가 관직에 제수되었거나 연행 또는 유배로 거쳐 갔던 곳의 주요 표식을 주제어로 삼아 편성하였으며, 그밖에 상소, 행장, 묘지, 제문 등 저술 전반이 수록되어 있어 숙종 대의 사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