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목판본 1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강경은 2세기 무렵에 인도에서 결집된 이후 동아시아에 널리 유포되어 대승사상을 크게 현양한 경전이다. 결집 당시에 인도에서는 반야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지혜의 사상을 결집한 금강경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불자 사이에는 금강경을 매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게 되면, 누구나 동일한 공덕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해 있었다. 그리하여 이 경전을 항상 수지하여 독송하고자 하는 수행의식이 강조되어 대중들에 의해 널리 독송되었다. 금강경의 범어는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a-parajnaparamita-sutra)이다. 인도에서 성립된 금강경은 그 후 중국에 전래되어, 402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으로부터 시작하여 703년에 의정(義淨)의 역출(譯出)에 이르기까지 300년 사이에 이른바 6종의 번역본이 완성되었다. 현재 금강경의 6역본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은 바로 구마라집에 의해 처음으로 한역된 것이다. 중국에서 한역 금강경이 유포된 이후 양나라 소명태자가 32과분으로 분장(分章)하였고, 당나라 육조 혜능(慧能) 등에 의해 주해가 끊이지 않고 찬술되었다. 이 책은 서발문이 없어 편찬배경이나 저자에 대해 알 수 없으나, 권말에 태종15(1415)년에 안엄사의 주지를 지낸 성거(省琚)가 쓰고, 해혜(海惠)가 화주로 조구(祖玽)가 발원자로 참여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 성거는 1420년에 장불사(長佛寺)에서 판각된 법화경의 판화본을 쓴 사실로 보아 이 책의 판각을 위해 판하본을 정서하였으며, 실제 편찬은 결의(決疑)를 부친 함허당 득통화상으로 지목한다.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엽을 기준으로 11행으로 한 행은 22자씩 배자되어 있다. 판면에는 계선은 없고, 반곽의 크기는 19.7×13.2cm이다. 중앙에는 판심이 있으나, 어미는 위쪽에 백어미가 하향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금강주(金剛註)’라는 판심제가 보이고 있어 이 책이 금강경주해본임을 알 수 있다. 지질(紙質)은 가느다란 발문이 보이는 매우 얇게 뜬 저지로 보아 조선 초기 불교전적에서 많이 사용한 종이로 보인다.
이 책은 금강경에 오가(五家)의 주해가 들어 있는 『금강경오가해』이다. 오가해는 중국의 양나라 부흡(傅翕)의 찬(贊), 당나라 육조 혜능의 구결, 송나라 야보 도천(冶父 道川)의 협송(挾頌), 당나라 규봉 종밀(宗密) 선사의 찬요(纂要), 그리고 송나라 종경(宗鏡) 선사의 제강(提綱)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태종15(1415)년에 안엄사(安嚴寺) 주지를 지낸 성거 등이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함허당 득통(得通)의 『설의(說誼)』는 보이지 않고, 다만 『결의(決疑)』만이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부흡의 편계·의타·원성과 청량선사의 경공·지공구공·유통, 그리고 육조구결이 부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본문에서 밝히지 못한 편찬 방침을 기술한 득통의 『결의』가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태종 15년에 한문본 『금강경오가해』가 간행된 이래로 득통의 설의(說誼)가 편입된 『오가해설의(五家解說誼)』가 세종 24(1442)년에 처음으로 양산사에서 개판되었으며, 그 후 세조 3(1457)년에는 오가해 완성본이 금속활자(丁丑字)로 간행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국의 유명 사찰에서 활자본을 저본으로 수차 복각되었다.
이 책은 금강경에 오가의 주해가 수록되어 있는 주해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편찬된 오가해금강경이며, 이후 이를 저본으로 언해본 삼가해와 활자본 오가해로 재편되는 초고본의 성격을 지닌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