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의 친필 유묵은 이원익이 영의정을 지내고 벼슬에서 물러난 말년에 손녀 이계온(李季溫)과 손자 등 후손에게 포은 정몽주 등이 지은 한시를 초서(草書)로 써서 남겨 준 서예 작품 13점이다. 이 친필 유묵은 후손에 의해 잘 보존되어 지금은 광명시 소재 충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당시 이원익이 쓴 유묵 중 일부는 경인년에 집안의 후손이 목판에 판각하여 인출한 인쇄본이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함께 보존되어 있다. 2010년 3월 23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그는 키 작은 재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성품이 담백하여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여 임금의 잘못한 일에 대해 직언하는 인물이었다. 선조에서 인조에 걸쳐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에 불과한 오막살이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조석거리가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이 친필 유묵은 이원익이 그의 말년인 80세에서 87세(1626∼1633) 사이에 손자와 손녀를 위해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야은 길재(吉再, 1353∼1419)의 시문집에서 한시를 가려 뽑아 초서로 쓴 서예 작품이다. 이들 유묵은 포은의 시 9점과 야은 시 1점, 그리고 작자 미상의 시 3점 등 모두 13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시문의 내용과 크기는 아래와 같다.
<포은 시>
승상 조반에게[贈趙相], 17세기 초, 84×52㎝
양자강(楊子江), 17세기 초, 84×55㎝
안렴사 유향을 떠나보내며[送柳按廉], 17세기 초, 86×55㎝
인일 조회 때 내리는 눈[人日朝會雪], 17세기 초, 87×55㎝
삼봉에게[寄三峯], 17세기 초, 83×54㎝
떠나는 이에게[送人], 17세기 초, 86×55㎝
음주(飮酒), 17세기 초, 83×55㎝
평교관에서 손수 글을 쓰다[平郊館手題], 17세기 초, 84×55㎝
김소년에게[贈金少年], 1633년(인조 11), 86×54㎝
계유모춘 출이손녀계온육수(癸酉暮春出貽孫女季溫六首)[1633년(인조 11) 늦봄 손녀 계온(季溫)에게 여섯 수를 써서 주다]
<그 외 詩>
대장부(大丈夫), 1632년(인조 10), 82×57㎝
임신하 서여손 오리노부(壬申夏書與孫梧里老夫)[1632년(인조 10) 여름 손자에게 써주다. 오리 할아버지]
학을 찾아, 1626년(인조 4), 56.2×78.1㎝
오리팔십옹서여손아 천계병인춘(梧里八十翁書與孫兒天啓丙寅春)[오리 80세 노인이 손자에게 써 주다. 1626년(인조 4) 봄]
고성에서, 17세기 초, 26.5×32㎝
한거(閑居), 17세기 초, 82×54㎝. 야은시(冶隱詩)
이와 같이 이원익의 친필 유묵 중에는 고려의 충신과 명신 포은과 야은의 한시에서 가려 뽑은 작품이 10점에 이르고 있는데, 이를 후손에게 남겨 줌으로서 은연중에 이들의 의리와 학문의 전통을 이어 나가기를 바랐다.
조선 중기 서예의 기풍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과 더불어 송설체(松雪體)의 조선화 경향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해서 · 행서 · 초서 등 각 서체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특히 초서는 운필 속도나 필획에 있어서 서사자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서체로, 이원익의 친필유묵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초서로 쓰인 작품은 주로 명사의 시문에서 발췌하여 이를 쓰는 풍조가 유행하여 비교적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유명 초서가는 황기로(黃耆老, 1521~ ? )와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초탈한 처사적 기풍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풍은 그의 아우 황영로와 사위 이우(李瑀, 1542∼1609), 그리고 그를 사숙한 후학들에게 전수되어 조선 중기와 후기 초서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의 친필 유묵은 전문 초서가의 활달한 서풍과는 달리 평생 강직하고 청빈한 삶을 영위하였던 그의 품성이 드러나 있는 듯 행초에 가까운 준경(峻勁)하고 둔중한 풍격을 보이고 있다. 이들 유묵은 그가 죽기 직전인 팔십대 후반까지 쓰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일생 동안 흐트러짐이 없이 살았던 그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이 친필 유묵은 말년에 고려의 충신과 명신의 한시 작품을 행초(行草)로 써서 후손들이 이들의 성리학적 전통을 배워 나가길 바랐던 마음에서 쓴 이원익의 작품으로, 명문 사대부가의 가학 정신을 살필 수 있는 데에 그 자료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