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재령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있다가 3·1운동 발발 직후 상경하여, 1919년 3월 정신여학교 동창인 이정숙(李貞淑)·오현주(吳玄洲)와 함께 정신여학교 학생 및 그 밖의 동지를 규합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을 통해 3·1운동을 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옥바라지 및 가족의 생계지원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임득산(林得山)이 가지고 온 편지를 받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는 한편, 기구도 확대하는 등 독립운동단체로서의 골격을 갖추어 나갔다.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대표 이병철(李秉澈)로부터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서는 부녀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최숙자(崔淑子)·김희옥(金熙玉) 등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와 통합,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편하고 총재 겸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평양·대구·개성·진주·기장·밀양·거창·통영·양산·울산·부산·마산·군산·회령·정평·목포·전주·광주에 지부를 조직하는 등 지방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회비와 회원이 만든 수예품 판매로 얻은 수익금을 군자금으로 송부하는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 오현주의 배반으로 동지들과 함께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