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는데, 이를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상고시대
신석기시대부터 국가형성기까지의 왕은 신권적(神權的)인 무(巫)였으므로 당시의 관모는 무관(巫冠)으로서의 색채가 농후하다. 그 원형태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의 시베리아 샤먼의 녹각모(鹿角帽)와 비슷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최근 소련 알타이산맥 부근의 스키타이(Scythai) 지방에서 출토된 서기전 1세기의 금관은 그 형태가 신라의 금관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문화교류는 기마 민족의 동점(東漸)과 더불어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물로는 신라의 왕관과 고구려의 왕관 및 벽화, 백제 무녕왕릉의 관전입식, 가야의 금관 등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들이 추장(酋長) 내지 왕의 관모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내관(內冠)이 있고 외관(外冠)이 있는데, 이 내관은 백화모(白樺帽)를 주로 한 일종의 평상시 관모로 보여지고 금관이나 기타의 외관은 의례용으로 추정된다.
(2) 삼국시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신라·가야의 금관 내지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왕관에 속한다. 그 원류는 스키타이 지방으로 추정되며, 최근에 출토된 시바르칸 지방의 금관도 신라의 금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계보상으로 보면 고구려의 보관이 먼저가 되고 다음이 가야·신라의 순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관모도 있고 금관도 있으나 백제 것과 합하여 몇 점이 되지 않는다. 백제의 것으로는 나주 신촌 출토의 금동관이 있다. 가야의 것으로는 호암미술관 소장 금관, 양산 부부총 금동관, 의성 탑리 조익식(鳥翼飾) 금동관, 산자형(山字形) 입화식(立花飾) 금동관 등이 있다.
신라 것으로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경주98호 고분의 금관, 교촌동 출토 금관, 1971년 국보로 지정된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등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들 금관은 구체적으로 어느 왕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추장 내지 왕의 관모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3) 통일신라시대
당제복식 채용에 따라 왕도 당제의 상복(常服)을 입어 이때의 왕관은 역시 복두(幞頭)가 되리라고 믿어지나 정확한 것을 현재 추상할 수 없다. 아울러 사모(紗帽)에 있어서도 절상건(折上巾)을 썼는지조차도 현재 알 길이 없다.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고관대의(高冠大衣)를 하고 돌아왔다고 되어 있으므로 사모가 아닌 다른 관모도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4) 고려시대
고려 초기의 왕관에 대하여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그 구조가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추측해보면, 왕관으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은 면류관뿐이고, 그 나머지는 신하들과 공유하고 있다. 이로 보면 제복(祭服)에는 면류관·구장복을 입고, 조복(朝服)에는 복두를 썼다.
상복(常服)에는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쓰고, 공복(公服)에는 복두를 쓰고, 편복(便服)에는 조건(皁巾)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중엽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에는 왕관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제 자체가 백관 공복에 복두를 그대로 쓰고 있었으므로 왕의 공복은 복두차림이었을 것만 추측될 뿐이고, 왕이 면류관을 썼느냐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 시기 고려 경내(境內)에서는 모두 개체변발(開剃辮髮 : 머리의 아랫부분을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땋아 늘인 몽고의 머리모양)을 하였으므로 왕도 이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고 있는 원나라 황제의 상에는 발립(鈸笠)차림도 있고 황제 및 그 가족상에서 보이는 관모도 있으나 이것을 고려왕이 썼을 것이라는 확증은 없다.
고려말에는 명나라의 모든 관모를 습용하였으므로 고려초의 제도로 복고(復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명의 복제는 당(唐)·송(宋) 제도를 본떠 만든 것이므로 그 소원관계는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5) 조선시대
조선에서는 고려 말에 명제 관복을 도입한 이후 이를 준용하면서 명나라의 의제개혁에 따라 충실히 습용하였다. 따라서 제복에는 면류관, 조복에는 원유관, 공복에는 복두, 상복에는 익선관을 썼다. 이 구조는 한말까지 그대로 준용되었으나, 한말 황제의 칭호에 따라 면류관을 12류면으로 개정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