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남전(藍田). 구례 출신. 아버지는 참봉 왕언기(王彦起)이다.
정유재란 때 왜장 시마쓰[島津義弘] 등이 구례에 침입하여 읍이 함락되자 격문을 내어 약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의병을 이끌고 하동과 구례 사이의 통로 가운데 요새지인 석주관(石柱關)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왜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곧 이어 아들 왕의성(王義成)이 이정익(李政翼)·한호성(韓好誠)·양응록(梁應祿)·고정철(高貞喆)·오종(吳琮) 등과 함께 다시 석주관에서 적을 맞아 항전하다가 죽음으로써, 이들과 함께 세칭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라 불리고 있다.
1804년(순조 4)에 조봉대부(朝奉大夫)·지평(持平)을 증직받았고, 1813년에는 정려가 세워졌으며, 1868년(고종 5)에는 석주관에 위패를 봉안하여 칠의단(七義壇)이라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