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1836년) 때의 저작으로 『남당집(南塘集)』 권27에 수록되어 있다. 한원진은 먼저 왕수인의 이론을 비판한 이황(李滉)의 논문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과 나흠순(羅欽順)의 『정암집(整菴集)』을 읽었으며, 그 뒤 친우 김교행(金敎行)으로부터 『왕양명전집』을 얻어 보고 이황과 나흠순의 비판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이 논문을 지었다. 그만큼 이 논문은 양명학에 대한 성리학적 비판이론의 더욱 깊이 있는 수준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체제는 양명학의 종지(宗旨)로서 세 가지를 제시하여 비판하고, 『왕양명전집』의 「대학문(大學問)」에서 6조목, 『전습록』의 「답나정암서(答羅整菴書)」 4조목, 「답고동교서(答顧東橋書)」 12조목, 「논연평(論延平)」 4조목을 뽑아 논변하고 있다. 끝에는 왕수인의 「양지영(良知詠)」 4수와 이 시를 차운(次韻)한 4수의 시를 싣고 치밀하게 비판해갔다.
한원진은 양명학의 핵심 논리로서 세 가지 종지를 들고 있다. 곧 논리(論理)의 종지인 ‘심즉리(心卽理)’, 위학(爲學)의 종지인 ‘치양지(致良知)’, 논학(論學)의 종지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장 먼저 들고 있다.
그는 심즉기(心卽氣)의 성리학적 입장에 서서 ‘심즉리’를 불교의 근본 입장인 심즉불(心卽佛)의 개념과 일치시킴으로써 양명학이 불교와 연결된 것으로 규정하며, 마음에서 인심과 도심의 양면성을 주목해 마음이란 결코 도(道) 혹은 이(理)와 일치시킬 수 없음을 강조한다. ‘치양지’의 문제도 왕수인의 양지(良知)의 개념이 마음의 허령명각(虛靈明覺)을 가리킨 것은 불교의 경우와 같고, 맹자(孟子)에 있어서의 인의(仁義)의 양지와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행합일’의 문제에서는 왕수인이 간이직절(簡易直截)을 좋아함으로써 궁리(窮理)의 학문을 폐지하는 것은,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가까운 것을 좋아하며 속히 이루고자 하는 사심(邪心)에 속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대학문」에 대한 비판에서 왕수인이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것을 명덕(明德)이라 보는 데 대해, 그는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것은 인(仁)의 일이요, 인이 되는 근거는 명덕이라고 지적하고, 왕수인이 친민(親民)을 명명덕(明明德)의 일로 삼아 친민을 중시하나, 친민의 근본이 명덕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왕수인이 『대학』 고본(古本)이 명백해 통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명백한지를 언급하지 않은 채 고본을 내세워 주희(朱熹)의 설을 파괴하고자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함께 세상 사람들이 물(物)과 이(理)를 밖에 있는 것으로 본다고 비판해 물리(物理)를 궁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물과 이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 비판한다. 또한, 왕수인이 양지를 곧 천리로 파악하는 데 대해 인욕과 대비시킴으로써, 양지는 천리가 발동해 인욕이 작용하지 못한 것이라 해석함으로써 천리가 발동한 상태이지 천리자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한원진의 양명학 비판은 이황의 비판보다 더욱 상세하고 다양한 점에서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저히 성리학적 정통론의 입장에서 양명학을 비판한 것이며, 따라서 양명학의 본의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가 양명 좌파(左派)인 이지(李贄)가 인륜을 저버린 점을 관심 깊게 기술해 덧붙이고 있는 것도 그 비판의 방증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