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신학교 (서울 )

서울 용산신학교 전경
서울 용산신학교 전경
천주교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개항기 에 건립된 학교건물. 근대건물.
이칭
이칭
성심기념관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서울 용산신학교(서울 龍山神學校)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근대교육문화/학교시설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12년 06월 20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9길 49-0 (원효로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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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개항기 에 건립된 학교건물. 근대건물.
개설

201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885년 원주 부엉골에서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전신)가 1887년 이곳으로 이전한 후 1892년에 건립되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코스트(Eugene Jean George Coste) 신부가 설계·감독 했다.

역사적 변천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실질적으로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자 천주교회는 함벽정(涵碧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이곳은 신학교로, 그리고 인근의 삼호정(三湖亭)자리(현재의 용산성당 일대)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할 계획으로 매입하였다. 신학생 증가에 따라 교사건물이 추가로 건축되었으며, 본 건물은 한때 주교관으로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1942년에 폐쇄되었다. 교회는 1944년에 성모병원 분원을 이곳에 개설함으로써 일제 말기에 자행된 건물수탈을 막을 수 있었다. 이곳 신학교 건물과 성당, 부속시설 및 대지 등은 8·15광복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으며, 1956년 성심수녀회의 설립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성심수녀회가 인수하여 수녀원과 학교법인 사무소로 사용하였다. 본래의 건물 일부에 증축이 이루어졌으나 최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법인 사무공간과 성심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용

용산신학교는 전후면이 1개 층의 높이 차이를 갖는 경사 대지를 이용하여 반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된 조오지안(Georgian)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다. 장방형 평면에 편복도를 전면에 두고 안쪽에 교실을 배치하였으며 1층 평면의 중앙에 지하층으로 통하는 외부계단을 두고, 좌우 끝단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정면은 중앙 현관부를 중심으로 좌우 3칸씩 벽기둥(pilaster)을 쌓아 모두 7칸으로 구획하고, 각 칸에는 결원아치(segmental arch)의 창을 두었다. 바닥은 목재마루이며, 동판가락잇기의 경사지붕에는 환기용 도머창을 두었다.

특징

전면은 지하층이 노출되어 3층으로 보이며 지면에서 양쪽으로 오르는 중앙계단과 결원아치의 지하층 출입구, 그리고 1층 현관의 박공(pediment)형 캐노피 등으로 중심성이 강조되고 있다. 벽체는 적벽돌을 조적하였으나 기둥과 처마 및 수평돌림띠, 창둘레 등 선적요소에는 회색벽돌을 사용하여 의장적 효과를 구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용산신학교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건물이자 서양식 벽돌조 건물로서, 매우 중요한 교회사적·건축사적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실태조사보고서』(학교법인 성심학원․재단법인 성심수도회, 2004)
『20세기 초 건축물 사진실측 조사 보고서』(문화재청, 2000)
문화재청(www.cha.go.kr)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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