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의 조선어문학과는 1945년까지 20여명의 졸업생을 내었는데, 그 중에서 1948년 6월 18일 방종현(方鍾鉉, 6회), 김형규(金亨奎)·손낙범(孫洛範)·정형용(鄭亨容)(이상 8회)이 방종현의 집에서 일차 모임을 가지고 6월 20일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이날 방종현, 김형규, 손낙범, 정형용과 정학모(鄭鶴謨, 7회), 구자균(具滋均, 8회), 고정옥(高晶玉, 11회) 등 7명이 모임을 가지고 ‘국어교육연구회’를 발기하고 위원이 되었으며, 8월 6일 ‘우리어문학회’로 이름을 고쳤다.
모임의 내용은 학술의 토론 및 국어국문학의 대학교육을 위한 교재의 준비간행 등 당면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되었으며, 이 노력의 결정으로 첫선을 보인 것이 1948년 8월에 나온 우리어문학회 편저 『국문학사(國文學史)』이다.
이 책은 상고문학은 정형용, 중고문학은 김형규, 중세문학은 손낙범, 근세문학은 정학모, 현대문학은 구자균의 분담집필과 검토로 수로사(秀路社)에서 본문 181면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다음으로 『국문학개론(國文學槪論)』이 1949년 10월에 A5판 336면의 단행본으로 일성당(一成堂)서점에서 나왔다.
이 책은 국문학의 형태는 고정옥, 국어학과 국문학은 김형규, 한문학과 국문학은 정학모, 향가는 손낙범, 가사·시조·소설은 정형용, 연극은 구자균, 민요는 고정옥의 분담집필과 검토를 거친 것으로 방종현의 서(序)가 있다.
1949년 10월 25일자로 회지 『어문(語文)』 창간호를 내었으며, 1950년 1월에 제2호를 내었는데, 제3호까지 간행하고 6·25로 중단되었다. 우리어문학회는 회원 중 북으로 간 사람도 있고, 1952년 10월 방종현이 피난지 부산에서 죽자 활동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1952년 12월, 그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출신을 주축으로 ‘국어국문학회’가 탄생하였다. 우리어문학회는 짧은 동안의 활동이었지만 광복 후 혼란하였던 시기에 학구(學究)들의 모임으로 큰 실적을 남긴 학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