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간 ()

유교
인물
조선후기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예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자징(子徵)
지족헌(知足軒)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2년(정조 6)
사망 연도
1838년(헌종 4)
본관
단양(丹陽)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예조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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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예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자징(子徵), 호는 지족헌(知足軒).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우덕창(禹德昌)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국성(尹國成)의 딸이다. 박문현(朴文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순조 때 아우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1811년(순조 11) 성균관박사에 제수되었다. 1814년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재직하면서 고을에 흉년이 들자 창고를 털어서 기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형조좌랑·사간원정언·예조좌랑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 뒤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세 차례 모두 끝까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우석간은 이 때 올린 소(疏)에서 임금의 덕과 당파의 지양, 인재의 등용 등을 건의하였다. 한편, 벼슬을 지내다가 사직할 의사를 표명한 시를 짓자 조정에 있던 신하 수백 명이 차운을 하여 화답하였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전서(篆書)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인정문명(仁政門銘)을 지어 올렸다.

또한, 「봉황책(鳳凰策)」을 지어 국가의 안녕과 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임금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였다. 저서로는 『지족헌집(知足軒集)』 3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지족헌집(知足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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