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4책. 목활자본. 간행 연대의 기록은 없으나, 1832년(순조 32) 저자가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봉안된 뒤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두에 연보, 영조의 교서·유서(諭書), 왕세자의 사제문(賜祭文), 이인행(李仁行)의 오천서원봉안문(梧川書院奉安文)이 실려 있다. 규장각 도서, 고려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2에 시 272수, 권3에 소(疏) 5편, 권4에 소 3편, 서(書) 12편, 계(啓) 1편, 전(箋) 5편, 권5에 서(書) 40편, 상량문 1편, 봉안문 1편, 행장 1편, 묘갈명 2편, 묘지명 2편, 비명 2편, 발(跋) 2편, 기(記) 2편, 권6에 제문 21편, 권7에 부록으로 제문 14편, 만사 19편, 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시·칠언시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칠언시가 많고 귀전의식(歸田意識)이 시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시, 영사시(詠史詩)도 많다. 관직 경력과 소 등에 나타난 시정(時政)에 대한 입장을 통해 볼 때, 저자는 학문적 측면보다는 관료적·경세적 측면에서 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소 중 「서경후초소(署經後初疏)」에서는 언로(言路)가 막혀 정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언로를 넓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탐관오리의 횡포 때문에 백성의 곤궁함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지평사직소(持平辭職疏)」·「재소(再疏)」와 「정언사직소(正言辭職疏)」에서는 양역(良役)·군정·환곡·형옥(刑獄)·역로(驛路)·영로(嶺路) 등의 폐단을 진술하고, 시정하도록 촉구하였다.
「계사(啓辭)」에서는 임무에 부적합하거나 실정(失政)한 관리들의 이름과 실정 내용을 지적하여 그들을 교체하였다. 서(書)는 채제공(蔡濟恭) 등 대신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대부분 시정의 폐단에 대해 논의하고 걱정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