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중(子中). 첨지중추부사 원송수(元松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원호(元豪)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원유남(元礻+谷男)이다. 형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산림(山林)인 박지계(朴知誡)에게 수업하였다.
1623년 아버지와 형을 따라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봉될 수 있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며, 그 공으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다 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더욱 성리학에 침잠하는 한편, 이의길(李義吉)·김극형(金克亨) 등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1628년 송광유(宋光裕)의 고변으로 체포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그뒤 진잠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에서 항복한 이후로는 출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원주와 여주 사이에 집을 짓고 오경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뒤 친우의 권유로 출사하여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공조정랑·사도시정(司䆃寺正)·의성현감·선산부사·충주목사·광주부윤(廣州府尹) 등을 지냈다.
충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곡식을 많이 축적하여 기근을 이기는 데 공을 세웠다. 성리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나, 학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 그것을 아는 이는 조익(趙翼)·장유(張維)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