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대 유적 ( )

목차
관련 정보
함북 경성 원수대 패총 출토 뇌문토기
함북 경성 원수대 패총 출토 뇌문토기
선사문화
유적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 민무늬토기 · 돌도끼 등이 출토된 선사유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 민무늬토기 · 돌도끼 등이 출토된 선사유적.
내용

청진에서 약 13㎞ 남쪽의 농포 유적(農圃遺蹟)에서 서남쪽으로 3㎞ 정도의 거리에 있는 오촌강(梧村江)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에 있다.

해발 약 5m의 낮은 골짜기에 형성된 조개더미 유적으로, 제3기에 융기된 대지에 바다와 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강반사지(江畔砂地)로 되어 있다. 30㎝ 정도의 표토 아래 유물포함층이 40㎝ 정도에 이른다. 유물 포함층은 조개껍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유적은 1933년사토(佐藤)라는 부근 초등학교 교장이 유물이 흩어진 것을 발견해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인 것이 확인되었다. 그 뒤 그 곳을 조사 중이던 일본인 요코야마(橫山將三郎)에게 알려져 간단한 시굴이 실시되었다.

그 뒤 1947년 북한학자들이 재차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보고서가 나와 있지 않아 단순한 지표채집이었는지 알 수 없다. 1933년 당시에는 비교적 많은 양의 유물과 유물포함 패층(貝層)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별다른 조사가 없었던 것을 보면 1947년 재조사 때에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던 듯하다.

1차 조사에서는 토기류·석기류를 비롯한 패제품(貝製品)과 자연식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대부분 빗살무늬토기계통이다. 그 중 1점은 뿔모양의 손잡이[把手]가 달리고 아가리[口緣]가 밖으로 휜 민무늬토기편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밖에 유물이 흩어진 것을 채집한 것으로 층위적인 발굴은 하지 않았던 듯하며, 이 민무늬토기는 표면에 흩어진 것이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이 많다.

주류를 이루는 빗살무늬계통 토기는 황갈색과 회흑색이 많고 다음으로 회백색과 적갈색이 많다. 안팎의 색깔이 다른 것이 많은데, 대체로 안쪽이 검고 균열이 없이 매끈한 광택이 나며, 표면에 붉은 안료를 칠한 것도 있다.

바탕흙[胎土]은 고운 점토를 사용하였고, 매우 가는 모래알이 섞여 있으며, 운모(雲母)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흙띠를 돌려 올린 방법[卷上法], 고리를 쌓아 만드는 방법[積輪法] 외에 손으로 빚어 만든 방법[手揑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릇형태로는 원통형·항아리형[甕形]·깊은바리형[深鉢形]·바리형[鉢形]·사발형[碗形] 등 다양하다. 바닥은 납작한(平底) 것 일색이며, 그 중 10% 정도는 올림바닥(上底)이다. 바닥에 먼저 원반형 흙을 깔고 그 위나 주위에서 흙을 붙여 올라간 흔적이 보이며, 아가리부분은 직립(直立)아가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가장 특징적인 무늬는 2조(條)의 평행선으로 직선적인 번개무늬띠[雷文帶]를 가로로 연속해 돌리고 그 안이나 밖을 점 혹은 평행선으로 채운 것인데, 이는 동북지방 특유의 문양이다. 이런 경우에는 문양이 전면에 시문되지 않고 몸통부[器腹部]에만 문양대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 밖에 뾰족한 무늬새기개[施文具]로 여러 줄의 물결횡선문[波狀橫線文]을 그리거나, 옆으로 돌려진 생선뼈무늬[魚骨文]·점줄무늬·손톱무늬[爪文], 빗금무늬[斜線文] 등이 있다.

이 밖에 토제품으로는 가락바퀴[紡錘車]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주판알의 하반부 2분의 1을 잘라낸 듯한 형태에 주위에 연호문(連弧文)을 새겼다. 또 네모난 토기편 양쪽에 홈을 내어 그물추[漁網錘]로 사용한 유물도 수습되었다.

석기로는 뗀석기와 간석기가 모두 출토되었으나 후자는 거의 없고 전자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흑요석제(黑曜石製)가 우세하다. 소량 출토된 간석기로는 얇은 혈암제(頁岩製) 돌도끼[石斧 : 대팻날인 듯함] 1점, 화강암 또는 사암제(砂岩製)의 숫돌편[砥石片] 3점, 석영제 공이[敲石] 1점뿐이다. 또한 형태가 다양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흑요석제의 돌날[石刃]·격지[剝片]·송곳(point) 등이 있으며 날이 톱날처럼 요철이 있는 것도 있다.

무기류(武器類)는 보이지 않는다. 장식품으로는 지름 3.2㎝ 정도의 납석제 돌고리[石鐶]가 있는데 이와 같은 석질은 청진 부근에 많이 묻혀 있다. 이 밖에 탄화(炭化)된 만주호두가 많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이 깨어진 껍질인 것으로 보아 열매를 까서 먹은 듯하다. 그 밖에 가축화된 중간크기의 개뼈가 나왔으며, 개랑조개·삿갓조개·굴조개·가막조개 등 조개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줄무늬밤조개로 만든 고리[貝輪]도 1점 발견되었는데, 팔찌로 쓰기에는 너무 작고 목걸이나 그 밖의 장식품으로 쓰였던 듯하다. 또 가리비로 만든 반달모양돌칼[半月形石刀]은 파편이어서 완형을 알 수 없으나 채집생활 외에 농경도 하였음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기타 골각제품으로 노루의 발등뼈를 가공해 만든 이빨이 여러 개 나 있는 토기 무늬새기개도 발견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 외에 채색토기(彩色土器)도 채집했고 흑요석제 석기도 수집했으나 보고가 너무 간략해 내용을 알 수 없다.

원수대 유적과 성격을 같이하는 유적은 농포패총, 검은개봉[黑狗峰], 웅기 서포항(西浦項) Ⅳ·Ⅴ기, 송평동(松坪洞) 등이 있다. 이 유적들은 회령군·경성군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함북지방 특유의 빗살무늬토기 유적이다. 이 유적들은 연해주(沿海州)의 신석기시대 유적인 자이사노브카(Zaysanovka) Ⅰ기 및 만주 일대의 유적들과 같은 문화영역에 속한다.

부근 유적인 농포패총은 이 유적과 문화내용이 거의 같고 지리적으로도 아주 가깝다. 원수대 유적의 경우 그릇의 종류가 줄어들고 문양이 간략화되는 점 등으로 보아 농포 유적보다 약간 늦은 듯하다. 또한 농포에서 많이 보이는 뼈뿔연장[骨角器]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말기 유적으로서 이 시기에는 이미 만주로부터 채도(彩陶)와 농경이 한반도에 전해져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졌다. 반달돌칼·납작밑토기·번개무늬토기 같은 요소들이 보이고 있어 연대는 대체로 서기전 2000년기(紀)로 간주된다.

참고문헌

「油坂貝塚に就いて」(橫山將三郎, 『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 1934)
「함경북도지방 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Ⅰ(황기덕, 『문화유산』 1957년 1호, 과학원출판사)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