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은 가로 56㎝, 세로 63㎝의 크기이며, 가로 20행(行), 세로 18간(間)에 총 331자를 음각하였다.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며,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국 허난성 뤄양(洛陽)에서 출토되었다. 왕씨부인의 본관은 낙랑(樂浪) 수성(遂城)이다. 6대조는 전연(前燕)에서 의동삼사 무읍공(儀同三司 武邑公)인 파(波)이다.
아버지 도민은 유영이주자사 광양정후(幽營二州刺史 廣陽靖侯)이다. 어머니는 관군장군 제주자사(冠軍將軍濟州刺史)를 지내고, 산기상시 안동장군 연군강공(散騎常侍 安東將軍 燕郡康公)에 추증된 창려(昌黎) 극성(棘城) 출신인 한기린(韓麒麟)의 딸이다.
뤄양에서 묘지가 발견된 안락왕(安樂王) 셋째 아들인 원빈지(元斌之)의 처 한씨(韓氏,482∼513)부인은 그의 동생이다. 시아버지는 세조(世祖) 태무제(太武帝)의 장자(長子)인 경목제(景穆帝)의 12자(子)인 안정왕(安定王) 휴(休)이다.
남편 원원평은 안정왕의 셋째 아들로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통직산기상시 전장군(通直散騎常侍前將軍)를 역임하였다. 그는 성질과 행실이 난폭해 구금되기도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 뒤 사면되어 원외상시(員外常侍)로 좌천되었는데, 525∼526년경에 사망하였다.
왕씨부인은 509년 5월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지는 그 때에 부장된 것이다. 원원평처왕씨의 묘지명을 동생인 ‘원빈지처한씨묘지명(元斌之妻韓氏墓誌銘)과 비교하면 그 내용이나 서체가 거의 동일하다.
이는 두 왕씨부인의 묘지가 친정인 왕씨가문에서 만들어진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묘지는 낙랑계 왕씨가 북중국으로 이주한 후의 활동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랑계 왕씨로는 뤄양에서 묘지가 발견된 왕정(王禎, 475∼514) 및 그의 동생 왕기(王基, 482∼522)가 있다. 또한, 『북주서(北周書)』에는 북주 문제(文帝)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와 그의 오빠인 왕맹(王盟, ?∼545)도 그 선조가 낙랑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왕씨들은 모두 6대조가 동일한 인물인 왕파(王波)로서 동일 가문 출신이었다. 왕기와 왕정의 가계에서 보듯이 낙랑 왕씨는 대대로 관직과 관작을 가지고 중국 북조(北朝)의 귀족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특히, 왕도민의 두 딸과 혼인한 원원평과 원빈지가 각각 경목제(景穆帝)와 문성제(文成帝)의 손자임을 보면 낙랑 왕씨는 북위의 황실과 혼인할 수 있는 유력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