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있었던 일종의 직업인으로서 이러한 월천꾼이 언제 나타났다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매우 흔하였다. 이들에게는 홍수가 나는 때가 대목이었다.
월천꾼이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옛 길이 많은 내나 여울을 건너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나루나 포구라면 거룻배가 있어서 쉽게 건널 수 있었지만 내나 여울은 신을 벗고 건너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양반이나 부인들은 신을 벗기 곤란하였으므로 자기의 하인이 없을 경우, 직업적인 월천꾼에 업혀서 건널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행(內行)일 경우 남자들에게 맨 발을 보이는 것은 금기였다. ‘발을 보인다.’라는 말은 여인이 곁을 허락한다는 뜻으로도 통하였으므로 유방을 내보이는 일보다 더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신을 벗고 맨발로 건너는 일은 거의 삼갔다. 내나 여울목에는 두서너 사람의 월천꾼이 기다리다가 이렇게 신을 벗기 곤란한 사람들을 업어서 건네 주고는 품삯을 받았는데 대개는 허우대가 장대한 근처 마을의 장정들이었다.
‘월천꾼에 난장이 빠지듯’ 하는 속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키가 작거나 체격이 왜소한 사람들은 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