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익휘(益輝), 호는 만수(晩修). 유현(柳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세헌(柳世憲)이다. 아버지는 참봉 유완(柳完)이며, 어머니는 허칙(許恜)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현릉참봉이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공조좌랑을 거쳐 1726년 병조좌랑과 정언(正言)이 되어, 당시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을 탄핵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문학·사서(司書)를 역임하였으며, 이 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재임하던 중 이른바 정미환국으로 노론 일파가 실세하게 되어 파직되었다. 1729년 재기용되어 언관을 두루 역임하였고, 지제교를 겸대하기도 하였다. 이어 북평사(北評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뒤에 용인현령으로 임명되어 재임하다가 죽었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자기임무에 충실하였다. 특히, 언관으로서의 활동이 곧고 바르다는 사관의 평을 받았다. 수찬으로 재직 중에 조태구(趙泰耉)·김일경(金一鏡)·이광좌(李光佐) 등 대신에 대한 탄핵이 집요하였으므로, 이를 만류하던 영조로부터 “목석우상(木石偶像)과 다름없다.”라는 질책을 들은 일화도 있다.
한편, 공인(貢人)의 감원과 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당시 사회상에 대한 넓은 식견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저서로 『만수재소차(晩修齋疏箚)』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