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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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유한양행을 설립한 실업가.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71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95년(고종 32)
  • 출생지평양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황명수 (단국대학교, 경제학)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 이후 유한양행을 설립한 실업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양 출생. 아버지는 상인이었던 유기연(柳基淵)이며, 어머니는 김확실(金確實, 개명 후 김기복)로 9남매 중 맏아들이다.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04년 9세 때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朴章鉉)과 그의 조카 박용만(朴容萬)을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스탠포드대학원에서 3년간 법학을 전공하였다.

학업을 마친 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922년 자립하여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다. 1926년 3월에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그해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독일의 도마크(Domagk, G. )박사에 의하여 개발된 ‘프론토실(Prontosil)’을 동양에서 제일 먼저 도입하였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였고, 이 무렵에 사세도 확장되어 만주·다롄[大連]·톈진[天津] 등 동북아 일원에 걸치는 방대한 시장을 확보하였다.

1939년 사업상의 이유로 도미하였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귀국하지 못한 채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였다. 유한양행은 1953년 휴전 이후 계속 성장하여 성실한 우수약품생산업체로서 안정된 지위를 구축하였다.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여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趙權順)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산업동탑훈장을 받았으며,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 - 『유한오십년』(주식회사유한양행, 1976)

  • - 『한국경영사연구』(고승제, 한국능률협회, 1975)

  • - 「기업가 유일한에 관한 연구」(황명수, 『논문집』8, 단국대학교출판부, 1974)

  • - 국가보훈처(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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