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보통학교를 나온 뒤 곧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 입사하여 촬영기사 이명우(李明雨)와 양세웅(梁世雄)에게서 영화촬영기술을 배웠다.
1940년 문화영화 「청명심(淸明心)」과 「산촌(山村)의 여명(黎明)」(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을 촬영, 편집, 현상하여 기사로서 데뷔하였다. 극영화로서는 박기채(朴基采)가 감독한 「나는 간다」(1942)에서 첫 촬영을 맡았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윤백남(尹白南)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일원으로서 「해방뉴스」 등을 촬영하여 활약이 컸다.
1947년 보스턴마라톤제패의 기록영화 「패자(覇者)의 수도(修道)」를 만들었으며, 6·25사변 중에는 종군촬영기사로 활약하였고, 휴전 후에는 서울의 복구의 모습을 담은 「빛나는 건설」(1954)을 만들었다.
극영화활동은 김성민(金聖珉) 감독의 「망나니 비사(悲史)」(1955), 양주남(梁柱南) 감독의 「배뱅이굿」(1957), 「종각(鐘閣)」(1958),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애련의 꽃송이」(1959) 등 예술적 향기가 높은 작품의 촬영기사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발성기 이후의 우리 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중진촬영기사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