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안동(安東) 출신이다. 자는 내봉(來鳳), 호는 소은(小隱). 뒤에 자를 명녕(鳴寧)으로 바꾼다. 아버지는 유상문(柳相文)이며 큰아버지인 유두문(柳斗文)에게 입양됐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작은아버지인 유낙문(柳洛文)에게 수학했다. 고문(古文)의 형식으로 글을 쓸 때는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문장은 막히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에 유장원(柳長源)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깊이 배운 유건휴(柳建休)에게 배움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당시 유건휴를 가르쳤던 유장원은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10권을 쓰고 소퇴계(小退溪)라고 추앙받던 이상정(李象靖)의 뛰어난 제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치구의 사상적인 맥락은 유건휴, 유장원, 이상정을 거쳐 퇴계 이황에 닿고 있다.
1827년(순조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열중했으나 부정과 부패로 일관되는 과거시험에 싫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학문에 전념하여 배운 것을 몸소 행하는 데에 힘썼으며, 이때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두 책을 열심히 읽어 일만 번을 읽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한편, 성리학자이면서 배운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선비의 학문이 이론에만 치우친 것을 개탄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장하기를 비록 우주의 이치를 깨우쳤다 해도 실천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배움을 직접 실천해 선비의 배움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합일(合一)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헛된 논의에 빠져 성리학에만 치우친 당시 학자와 달리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고(遺稿)로 『소은집(小隱集)』 4권이 있으며 한문소설 「천군실록(天君實錄)」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