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군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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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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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때에 정기화(鄭琦和)가 지은 고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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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순조 때에 정기화(鄭琦和)가 지은 고전소설.
내용

조선 순조 때에 정기화(鄭琦和)가 지은 고전소설. 1책. 한문필사본. ‘심사(心史)’라고도 한다. 의인소설로 천군소설(天君小說)의 일종이다.

≪천군본기≫ 필사본은 아들 현석(顯奭)의 교정을 거쳐 손자 헌시(憲時)가 편집하여 1885년(고종 22)에 간행한 것을 후인이 베껴 낸 것이다. 표지에 ‘心史(심사)’라 쓰여 있다. 1917년 백두용(白斗鏞)이 토를 달아 한남서림(翰南書林)에서 간행한 활자본 1책도 있다. 이 작품의 저작 연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작자의 생애로 보아 19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천군본기≫는 사람이 태어난 해부터 30세까지의 심성(心性)의 변화과정을 제왕의 치란(治亂)과 성쇠(盛衰)의 근본원리로써 설명한 것이다. 마음 속의 갈등을 충신형과 간신형의 인물의 대립·갈등으로 사건을 진행시켜 나간다.

≪천군본기≫ 권두에 정기화의 자서(自序)와 본서의 입언(立言)한 방법을 논술한 총론이 실려 있다. 본기(本紀)에서는 먼저 천군(心)의 시호를 명원(明元)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천군의 내력을 중국의 역사와 혼용하여 설명하였다. 그 연조(年條)의 끝에는 반드시 사신(史臣)의 평을 첨부하여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천군본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년(元年)에 천군이 즉위하여 연호를 중화(中和)라 하였다. 강자(腔子 : 가슴속)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삼고 섬겼다. 2년에 도읍을 제주(臍州 : 배꼽)로 정하고 별호를 허명계(虛明界)라 하였다. 3년에는 공(恭)·종(從)·명(明)·총(聰)·예(睿)로 오사(五事)의 벼슬을 삼았다. 4년에는 순우선(淳于善)을 좌승상, 전지절(田知節)을 우승상으로 삼았다. 5년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의 사사(四司)를 설치하였다. 신(信)으로 사사(四司)를 감독하게 하였다.

6년에는 칠규(七竅)를 파고 비간묘(比干墓)를 봉하여 사당을 세웠다. 7년에는 방당반묘(方塘半畝)를 조성하였다. 8년에는 단전(丹田)의 경계를 정하였다. 9년에는 의마(意馬)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려고 하였다. 수보(收父)가 간하나 듣지 않는다. 10년에 이(彛)·편(褊)·기(忮)로 후작을 삼고 각기 봉하였다. 11년에 천축국(天竺國)으로부터 원숭이를 헌상 받았다.

12년에는 사두(四蠹)·오구(五寇)·이호(二豪)·칠탕(七蕩) 등의 유혹을 받았다. 13년에 천군이 이들과 어울려 방탕해졌다. 14년에는 천군의 방탕이 심해져 제응물(齊應物)이 난을 일으켰다. 사사(四司)와 신감(信監)이 경계하여 노래를 지어 부른다. 15년에 더욱 방탕하고 유혹이 심해져 16년에는 예예(艾艾)라는 미녀에게 혹한다.

17년에 사성자허(司星子虛)가 간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사성자허는 이에 낙담하여 은둔해버린다. 18년에 천군이 나가 노닐려 하였다. 좌우상이 간하였다. 돌아와 군신상열지대(君臣相悅之臺)를 지으라고 하고 이름을 영대(靈臺)라 하였다. 19년에는 성옹(惺翁)으로 태사(太師)를 삼았다. 20년에는 간신을 귀양 보냈다.

21년에는 예예를 내치고 신씨(愼氏)를 황후로 맞아 들였다. 22년에 무형구(無形寇)가 침범하자 지수(志帥)를 보내 물리쳤다. 23년에 진무망(眞無妄)을 성의백(誠意伯)에 봉하고 중용(中庸)의 문을 세웠다. 24년에는 편(褊)과 기(忮) 등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천군이 크게 깨달아 평정하였다. 25년에 진경(眞經)을 강하였다.

26년에는 오대부(五大夫) 사(思)가 근록(近錄)을 찬하였다. 27년에는 경부(敬夫)를 시켜 활수(活水)의 피해를 막았다. 28년에는 아들 양(良)을 황태자로 삼았다. 29년에는 순수(巡守)의 예를 하였다. 30년에 병이 들었다. 그러나 성찰(省察)·극치(克治)·존양(存養)의 법으로 다스려 낫게 하였다.

≪천군본기≫는 30년간의 성장과정에서 나이에 따른 심경의 변화와 빠지기 쉬운 유혹 등을 기술하였다. 유교적인 도덕률로써 부단히 수양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작품 끝에 논평부(論評部)를 첨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의 형식을 답습하였다. 각 연조 끝에 사평(史評)을 붙여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교훈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화사 花史≫에서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천군본기≫는 <수성지 愁城誌>와 <천군연의 天君演義>를 답습하여 소설화한 것이다. 작자 정기화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논리를 소설화하면서 ≪사기≫·≪춘추≫·≪자치통감≫ 등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 따라서 소설의 형식으로서는 오히려 흥미의 격감을 초래하였다고 하겠다.

≪천군본기≫ 필사본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활자본은 1917년 한남서림에서 간행한 현토본이 있다. 그 뒤에 이것을 대본으로 하여 주석을 붙여 번역하고 출판한 김광순(金光淳)의 ≪천군본기 天君本紀≫가 있다.

참고문헌

『천군연의 부심사』(백두용 편, 한남서림, 1917)
『수성지·천군본기』(김광순 역주, 형설출판사, 1979)
「심사(心史)」(임명덕 편, 『한국한문소설전집』 6, 중국문화대학·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천군소설연구』(김광순, 형설출판사, 1980)
「천군소설」(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한국고전문학전집』 26, 1996)
「이조천군관계소설의 연구」(김현룡, 『상명여자사범대학논문집』 4,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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