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유통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은 화폐의 유통을 뜻하며, 상품유통은 오히려 생산에서 소비를 향하는 일반적인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통이라고 하면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큰 영역인데 흔히는 상품유통을 가리키며, 그것은 생산물의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교섭인 거래활동과,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생산물의 이동 그 자체를 포함한다.
어떤 상품이 생산자로부터 최종소비자에게 사회적으로 유통해 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그 상품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 있어 상품유통을 위한 수많은 유통담당기관이 어떤 관계에 따라 연결되고 서로 작용하는 질서 있는 유통기관의 집합체를 유통기구라 한다. 즉, 생산자-유통업자-소비자가 거래관계로 연결되어 체계화되고, 그것이 정착하여 일정한 형태를 형성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구 또는 조직이란 일정한 기능을 다하기 위한 일정한 관계의 상시적인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성립되려면 구성요소가 되는 기관과 기관 상호간의 관련성이 늘 있어야 한다.
본래 기구를 사회경제적 개념으로 인식할 때에는 분배기구를 구성하는 요소는 주로 개개의 분업이고, 분업과 분업과의 상시적인 매매관계라고 할 수 있다.
유통의 종류에는 본래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이 있어 서로 교환 또는 교류, 매매로 나타나고, 경제조직으로서의 유통기구와 각 기업체의 경영조직으로서의 유통기구의 두 가지를 포함한다.
유통기구에는 수집기구·중계기구·분산기구가 있으며 각각을 담당하는 유통기관이 있고, 이들 기관이 어떤 거래관계로 연결되는 유통경로가 형성되어 상품이동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생산자가 자기 제품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하여 형성하는 것, 도매업자가 형성하는 것, 소매업자가 형성하는 것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하고, 분화되어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그 경로가 긴 것과 짧은 것, 규모가 큰 것과 영세한 것들이 혼재하여 유통질서를 지켜나가는 데 유의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질의 생산이 수렵·목축·농업·가내수공업·공장제공업으로, 자기생산에서 타인생산, 즉 시장생산에 의한 시장경제체제로 발전함에 따라 유통은 물물교환, 화폐에 의한 거래인 매매로, 그리고 직접교환에서 중간업자가 개입하는 간접거래로 발달하였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중간상인의 활동은 그리스의 아테네경제에서부터이고, 그것이 로마시대로 옮겨져 번성하고, 다시 영국으로 옮겨져 앵글로색슨시대 후기에 와서 시장(market)과 정기적인 장(fair)이 발달하였다.
중세기 말에는 도매상거래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때 수수료상과 중개상(factor)이 나타났으며, 19세기 초에는 미국의 서해안 도시에 수입상품을 취급하는 이출상(jobber)이 나타났다.
대리상으로서 제조업자대리상·판매대리상·중개업자들이 나타났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대규모소매상인 백화점·연쇄점 등이 나타나 도매상의 존속 발전을 위협하게 되었다.
한편, 제조업자들도 그들 자신의 도매기구를 설치하게 되어 결국 일반 도매상은 대규모소매상과 제조업자 양면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어 그 기능과 세력이 감퇴되어 수난을 겪게 되고, 그 뒤 자구책으로 연쇄도매상·전문도매상 또는 전속도매상 등으로 경영 개선과 기능 강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규모제조업자의 세력팽창에 대항하기 위하여 백화점을 비롯한 소매업자들이 집단구매력을 형성하여 중앙집권적인 연쇄화·협동화, 소비조합 구성을 하는 등 소매기구 확대와 대규모적인 새로운 경영방식을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대에는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소비를 연결하는 대량유통이 요구되어 도매기구·소매기구가 대형화되고 새로운 경영기술이 등장하고 있어 유통 개선이 기대되고 있다.
고고학적인 연구성과에 따르면 우리 선인들은 한반도의 여러 해변이나 강변의 낮은 언덕에 정착하면서 유문토기·민무늬토기를 생산하여 생활자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이미 토기를 생산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장인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들이 생산한 토기 중 일부 또는 대부분은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갔을 것이며, 그 반대급부로서 필연적으로 다른 재화나 용역이 장인에게 지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삼한·부여 등에서 삼베·명주 등 여러 가지 피륙이 생산되었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변진에는 쇠가 생산되며,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이를 취하고, 모든 저자에서는 용철(用鐵)을 사는데, 중국에서 용전(用錢)하는 것과 같다(國出鐵 韓濊倭皆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라는 기록을 미루어볼 때, 당시 이미 재화나 용역이 국내에서 나름대로 유통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간에도 유통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이 쇳물을 녹여 내고 이를 달구어서 도끼·망치·칼·낫·솥 등을 만들어 직접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재화나 용역과 교환했다는 사실은 이 때부터 계급사회로 이행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삼국사기≫에는 “소지왕 12년(490)에 처음으로 경사시(京師市)를 열어 사방의 물화가 유통되었다.”고 하였다. 단편적인 기록이어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보다 앞서 신라의 육촌(六村)이나 고구려·백제 등의 수도와 각 고을의 교통요충지에서는 여러 가지 문물이 유통되고 있었다. 유통의 매체로서는 곡식과 삼베 등 실물화폐가 쓰였다.
≪해동역사≫의 전화조(錢貨條)에 “금·은으로써 전(錢)을 삼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서로 물화를 교역하였고, 서로 이웃한 중국·일본 등과도 활발한 무역을 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발달된 대륙 문물이 삼국에 들어와서 정착하는 한편,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신라의 국도(國都)였던 경주에 개설된 시장에서의 상거래 질서와 운영을 감독하기 위한 관청으로서 동시전(東市典)은 509년(지증왕 10)에, 서시전과 남시전은 695년(효소왕 4)에 각각 개설되었다. 그리고 각 시전직제로서는 감(監) 2인, 사인(舍人) 2인을 두었다. 이 당시의 시장에서의 주요 거래품은 피와 쌀로 물물교환을 하였다.
고려시대 초엽이나 중엽까지도 상설점포는 없었고 행상들과 소규모생산자들이 모여서 물물교환하는 식의 시장만 있었으며, 주로 직물과 쌀로 거래하였다. 1205년(희종 1)부터 1211년 사이에 관에서 개성의 시장을 상설적인 전포(廛鋪)로 만들었고, 이 시전(市廛)을 감독하기 위해 신라시대의 3시전에 해당하는 경시서(京市署)를 두었다.
특기할 것은 고려 말기인 1375년(우왕 1)부터 1388년에는 개성의 물가가 폭등하자 경시서로 하여금 물가를 평정하게 하고, 상품에는 세인(稅印)을 찍어서 표지로 삼고 그러한 표시가 없는 상품을 파는 사람은 처벌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에 개성의 시전을 본떠 1399년(정종 1)부터 1400년에 관설시전을 두었으며, 그 좌우행랑(左右行廊)은 800여 칸이나 되고, 길이는 지금의 광화문(당시 惠政橋)에서 종로 3가에까지 이르렀다.
행랑은 당시 한양의 상업중심으로서 여러 개의 일반 소매상인의 점포로 구분되고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팔았으며, 이들 시전은 관설건물이어서 상인들에게 비싸게 임대되었다.
이 관청소유건물은 공랑(公廊)이라고도 하는데, 궁중과 관청의 수요품을 납품하는 일과 더불어 현물지대(납부미), 공납물, 외국사절의 지참물 등을 취급하였으며 정부지정판매인들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이들 어용특권상인단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육의전(六矣廛)으로, 그 경영권은 정부에 대한 많은 부담과 공헌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특전이 주어지고 정부에 의하여 수시로 교체, 변경되었다.
육의전은 여섯 가지의 대전(大廛)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선전(縇廛)·면포전(綿布廛)·면주전(綿紬廛)·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지전(紙廛)·저포전(苧布廛) 등이었다. 이들 공랑을 사용하는 상점을 좌고(坐賈)라 하며 소상인들이 보통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점고(店賈)라고도 하고, 또 소매상을 산고(散賈), 포목상은 특히 절척(折尺)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상거래는 좌고와 행상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전(廛)은 시전이라는 뜻으로 시가지에 있는 상점을 가리켰다.
상점에는 대·중·소의 3종류가 있었지만 제일 큰 것을 전이라 하고, 그 다음을 방(房)이라 하였는데, 방은 실(室)이라는 뜻으로 제조판매하는 곳을 가리키며, 세공하여 파는 상가를 말했다.
그리고 가가(假家)는 방보다 더 작은 소매상점으로, 본래 큰길 옆에 임시로 만든 가건물 또는 처마 밑에 간단하게 차양을 치고 만든 자리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고, 노점(露店)과 더불어 작은 상점을 통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있어 시전 이외의 대표적인 소매기관으로는 행상인 보부상이 있었다. 보상은 주단포목·관구(冠具)·일용품 등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수명씩 떼지어 각 지방의 장날(5일장)을 찾아다니면서 소매를 하는 행상이다.
부상은 도자기·칠기·철물·건어물·일용품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각 지방의 장날을 찾아다니는 행상이다. 이들 소매상들은 도매상인 객주·여각으로부터 거간을 통해 물품을 구입하였다.
도매기관인 객주·여각들은 도매업·창고업·위탁판매업·운수업·여숙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예금·대부 및 어음의 할인·발행 등의 금융업까지도 겸하는 거상(巨商)들이었다.
객주는 서울에만 있었고, 직물·실·가죽·약재·금종이·발·부채 등 여러 물품을 취급하였다. 여각은 중앙과 지방에 다 있었으며, 취급품은 주로 소금·어류·해조류 등 해산물이고 쌀·담배·청과물도 취급하였다.
여각은 객주에 비해서 설비가 크고 부속설비로서 창고·마방(馬房)도 있어 우마의 숙박도 취급하였다. 약재도 약령시가 생겨 봄과 가을 또는 1년에 1회 거래가 개시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1808년(순조 8)에는 전국의 시장 수가 1,092개 소나 되었고 1900년에는 약 900개 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전과 향시를 감독하기 위한 관청으로서 평시서(平市署)를 두었고, 감독관을 본방(本房)이라고 하고 그 위에 접장(接長)이라는 직을 두었다.
1910년에는 재래시장 수가 980개 소이던 것이 1917년에는 1,210개 소, 1922년에는 1,237개 소, 1926년에는 1,301개 소, 1930년에는 1,425개 소, 1935년에는 1,494개 소, 1936년에는 1,507개 소로 늘어났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5일장 중에서 매일시장으로 변화하는 것이 생기고, 지방군청소재지, 기타 주요 읍면 등의 성내시장(城內市場)에는 수시로 장을 벌이는 것으로서 매일 아침·저녁 2시간의 저자라는 시장이 서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 번창한 것은 하루 종일 시장을 벌이는 전일시장(全日市場)이 되었다.
한편, 농촌에도 상설점포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1938년에는 촌락시장에 산재하는 점포 수는 7만 4493개 소에 이르렀다.
그리고 농민들의 자급자족인 물물교환의 성격에서 농회(農會)·금융조합 등이 조직되어 공동판매사업을 하게 되었으며, 재래시장의 성격도 공업원료공급시장으로 변하게 되고 농가경제의 화폐경제에로의 발전과 아울러 공업생산품의 판매시장적 성격도 띠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 나라에서도 도시의 근대적인 상업조직과 농촌의 재래시장이 공존하는 이중구조의 시장조직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정책에 따라 재래시장을 고의적으로 미개발상태로 내버려두고 생산 위주의 정책을 펴 판매유통정책을 소홀히 하였다.
광복 후에도 종래의 잡화점과 재래시장, 도시의 소매기관은 아직 특화(特化)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일제가 남기고 간 시장 또는 유통기관을 맡아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76년의 도소매업 조사에 따르면 총 유통업체 41만 3911개 소 중 법인업체는 1%인 4,328개 소이고, 99%가 개인업체로 40만 9583개 소에 이르렀다.
그 중 총 소매업체 수는 39만 3651개 소이고, 도매업체는 2만 260개 소였는데, 이러한 사실로 우리 나라의 소매기관이 전근대적인 소규모 영세기업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도매기관은 대부분 도매와 소매가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도산매상이 많다.
도매기구의 비기업적 운영과 대규모 생산기업에 의한 유통업체가 생기고, 유통경로의 단축운동에 의한 배척으로 도매기관은 쇠약화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도매상의 존재 이유는 충분히 있으므로 새로운 경영혁신을 시도하게 되었다.
1986년 말 당시 경제기획원 조사에 따르면 총 도매업체 수는 6만 8760개 소였고 그 중 섬유 및 의류 도매점은 1만 4748개 소, 의약품 및 화학제품 도매업은 6,254개 소, 기계 및 장비 도매업은 6,708개 소, 철물 및 가정용기구 도매업은 4,950개 소, 건축재료 도매업은 2,951개 소, 금속 및 광물 도매업은 2,253개 소, 운수장비도매업은 1,790개 소, 그 밖의 도매업은 1만 2560개 소로 나타났다.
특히, 우리 나라의 중앙도매시장은 <농수산물도매시장법>(1951)에 따라 설치, 운영되고 있으며, 채소 및 수산물의 집산시장으로서 생산자 출하단체 또는 산지상인으로부터 도시의 소매상에게 유통을 신속히 하기 위해서 설립된 공적시설로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보호하고자 비영리적 공공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전국 20개 도시에 30개 소의 중앙도매시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중 10개 시장은 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이 대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매유통의 경우 상설시장(720개 소)과 정기시장(5일장, 934개 소)은 읍이나 면소재지에서 개설되고 있었다.
1986년 말의 전국 총소매업체수는 63만 7762개 소에 달하였으며, 그 중 식료품 및 담배 소매점은 30만 4404개 소, 섬유 및 의복, 신발 및 의복액세서리 소매점은 10만 2570개 소, 가구·철물 및 가정용품·가전제품 소매점은 4만 8310개 소, 약품·화장품 및 기타 화공약품 소매점은 3만 8897개 소, 장신구 및 시계 소매점은 1만 737개 소, 종이·인쇄물 및 문구용품 소매점은 4만 2247개 소, 개인운수장비·주유소 소매점 8,636개 소, 가정용연료 소매점 1만 7686개 소, 기타 소매점 5만 6926개 소로 모두 63만 413개 소의 소매점이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 소매점으로서 백화점 97개 소, 슈퍼마켓 2,123개 소, 달리 분류되지 않은 종합소매점 5,129개 소 등 7,349개 소의 종합소매점이 있었다. 1996년 말 현재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도소매업체수는 98만1047개소로 나타나 있다.
1987년의 경우 우리 나라 유통업계의 발전현황을 보면, 백화점·쇼핑센터 등의 대규모 소매점과 슈퍼마켓 등 현대적 소매점은 매출규모면에서 고도성장을 이룩한 반면, 군소업체의 독립소매점은 전반적으로 판매가 부진하고 성장이 둔화되었다.
백화점·쇼핑센터의 경우는 매출신장률이 33.0%나 되었고, 슈퍼마켓은 11.0%의 신장률을 나타내었는데, 독립소매점의 경우에는 매출감소를 보인 업체는 전체의 44.7%에 달하고 증가한 업체는 15.9%에 머무르며, 그 밖에는 평행상태를 나타냈다.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실물의 유통뿐만 아니라,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의 유통도 활발해지면서 증권관계 기관도 발달했다. 주식이 점차 대중화됨에 따라 참여인구도 점차 증가하고 있고 국민주의 보급에 따라 증가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관계·업계·학계의 유통근대화에 대한 협동과 노력으로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로부터 생성되어 내려온 재래시장 주축의 전근대적 후진성을 많이 탈피하고 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전략의 성공으로 시장환경의 변화와 여건의 성숙에 따라 우리 나라의 유통구조도 상당히 개혁되어 선진화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유통구조의 개선이 우선화되어야 하고, 도매기구와 소매기구의 균형적 발전으로 유기적인 기능 발휘가 되도록 개선되어야 할 것이며, 유통시설의 고도화, 유통기관의 개발, 유통요원의 양성과 확보 등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유통기구의 대형화 및 능률화, 경로의 단축화, 고생산성화가 되어 생산과 소비의 대량화에 대처하는 유통의 대량화가 이루어져 유통이 생산과 소비를 원만히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유통 중심의 시장경제체제가 발달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물적유통에 힘써 유통단지 조성으로 유통의 대형화 경로의 단축과 직송 그리고 유통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콘테이너시스템으로서 육·해·공의 일관수송에 의한 유통의 신속·안정, 경비절약 등 유통의 현대화를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