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익지(益之), 필보(弼甫)
시호
공양(恭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2년(세종 24)
사망 연도
1483년(성종 14)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좌승지|호조참판|강원도관찰사|공조판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지(益之)·필보(弼甫).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승례(尹承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윤번(尹璠)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윤사흔(尹士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7년(세조 3) 음보로 세자우참군(世子右參軍)에 처음 제수되고, 그 뒤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같은 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좌부승지가 되었고, 이어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그 뒤 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고, 1470년(성종 1)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1471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으며, 같은 해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72년 공조참판으로 경기도관찰사를 겸하였고, 그 뒤 이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행형조참판(行刑曹參判)·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47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연평군으로 개수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80년 행경상도관찰사·공조판서가 되고, 1483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면서 다시 영평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양(恭襄, 또는 恭良)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전고대방(典故大方)』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