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언국(彦國), 호는 석유(石囿). 아버지는 윤기동(尹紀東)이며, 뒤에 윤면동(尹冕東)에게 입양되었다.
1789년(정조 13) 삼일제(三日製)에 장원해 직부(直赴: 초시나 복시를 거치지 않음)로 전시(殿試)에 나갔으나, 상신 채제공(蔡濟恭)이 제술(製述)이 아름답지 않다 해 삭과(削科)를 청하였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아버지가 책을 읽는 단정하고 깨끗한 선비인데, 아들이 글을 못한다고 헐뜯는 것은 이상하다 하고 면시(面試)에 합격시켜 복과(復科)를 명하였다. 그 뒤 사헌부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좌승지가 되었다.
이 때 왜어역관(倭語譯官) 등이 왜인과 비밀리에 모의해 서계(書契)와 도서(圖書)를 위조한 사건이 일어나자 동래부안핵사가 되어 동래에 내려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 범인을 엄벌하였다.
다시 병조참지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고, 뒤에 형조참의·강릉부사·대사간·좌승지·호조참판을 거쳐 사신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청의 수도 연경(燕京)에 머무르는 동안 몸가짐을 근엄하게 하고 유람을 일삼지 않았으며, 공무가 아니면 관외(館外)에 나가지 않고 비리에 관여하지 않아 사람들이 공경하고 어렵게 여겼다 한다. 이어 병조참판·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가의대부로 품계가 올라 이조참판과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평소에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해 관료 생활 40년에 내외 요직을 거쳤지만 집안의 재산이 불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속적인 권세와 이익, 그리고 번잡하고 화려한 것도 조금도 부러워하는 기색 없이 예사로 보아 넘겼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충후(忠厚)하고 덕망이 높은 것으로 추장(推奬)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