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고종 18)∼1960년.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이다. 본명은 세린(世麟),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상원(庠元)이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공부한 다음 고향의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의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에서 5년 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1906년부터 3년 동안 대구에서 수학(數學)을 공부하였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다음 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金敎獻)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南道本司)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뒤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조직의 정비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간행, 인재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