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겸(士謙). 윤봉종(尹奉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길(尹吉)이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윤수민(尹壽民)이며, 어머니는 한극창(韓克昌)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2년(선조 35) 승문원박사로 진출하였다. 2년 후 성균관전적, 지평문학에 제수되었고, 이 때 현릉참봉(顯陵參奉)으로 파견되어 현릉의 관리를 맡기도 했다. 이어 정언·지평·헌납·사서·문학·전적을 두루 역임하였고, 1607년(선조 40)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간 오백령(吳百齡)과 동서지간이 되어, 상피법(相避法: 일정한 친족간에는 동일한 관서나 직속관계에 있는 관서에서 함께 근무할 수 없도록 한 법)상 교체되었다.
그 뒤 부사직(副司直)·집의·필선·보덕·사간·부수찬·승지·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했으나 외척을 아첨으로 섬겨 오래도록 청요직(淸要職: 학덕과 문벌이 높은 자가 받는 관직)을 차지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 즉위 시 임해군(臨海君) 관련 옥사 때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서 참여한 공으로 익사원훈(翼社元勳)의 공신에 들었고, 영평군(鈴平君)으로 봉군되었다.
광해군 초 유영경(柳永慶)을 필두로 한 소북에서 김대래(金大來)와 함께 명사였으나 서로 탄핵하였다. 당시 소북은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윤양은 청북, 김대래는 탁북에 속하였다. 김대래가 유영경을 위해 허준(許浚)의 일로 혐의를 받자, 이론을 제기하여 대래를 사사케 했고, 유영경의 죄를 논핵하기도 했다. 임해군 옥사에도 간여하였고, 인조반정 후 삭훈(削勳: 공훈이 삭제됨),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