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장령, 남양군수, 평양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길보(吉甫)
이지당(二知堂)
시호
익헌(翼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1년(현종 2)
사망 연도
1729년(영조 5)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정언|장령|남양군수|여주목사|성주목사|함경도관찰사|평양감사
관련 사건
무신의 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장령, 남양군수, 평양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이지당(二知堂). 윤종복(尹宗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수열(尹受說)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윤택(尹澤)이며, 어머니는 안영달(安穎達)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3년(숙종 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참봉·봉사를 역임한 뒤 1698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곧 전적·황해도도사를 거쳐 이듬 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헌납·지평·장령 등 언관을 역임하면서 궁장토(宮庄土)의 폐단을 지적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등의 언론 활동을 폈다.

그 뒤 시강원에 들어가 제자를 가르쳤고, 장악원·군자감의 정을 거쳐, 외직에 나가 남양·양주 군수를 역임하였다. 1705년 사간에 올랐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모함을 받아 국문을 받았지만 결백이 밝혀져 석방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다.

1716년 성주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하여 품계가 올랐고, 돌아와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친 뒤 돌아와 한성부의 우윤(右尹), 형조·병조·호조의 참판을 지냈고, 도승지를 여러 차례 역임한 뒤 1720년(경종 즉위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함경북도(咸鏡北道)의 풍속이 비루함을 보고 관혼상제의 예절을 보급하고, 사서삼경을 간행해 열읍(列邑)에 배포하는 등 함경북도 교화에 노력하였다. 또 진(鎭)과 보(堡)를 증설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독려해 국방을 강화하는 등의 치적을 올렸다.

그 뒤 한성판윤으로 돌아왔으나 성주목사와 함경감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용천부(龍川府)에 정배되었다. 그 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할 때에 석방되어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친 다음 파직당했다가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 등이 무신란(戊申亂)을 일으키자,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로 기용되어 평안도 일대에서 민심을 무마하고 돌아와 곧 죽었다. 1748년(영조 24) 무신란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