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초명은 윤양(尹暘).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증좌찬성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윤변(尹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윤방(尹昉)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공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특진하였으며,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여 우승지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첩의 남동생인 서양갑(徐羊甲)에게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20년 무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당시 대북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동지중추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의 좌윤·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인조를 공주에 호종하였으며, 그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護從: 호위하여 따름.)하였으며, 적과의 강화를 강력히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632·1635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에 참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다음해 서울에 돌아와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계음만필(溪陰漫筆)』·『도재수필』·『도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