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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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와 군(君)을 봉작할 때 앞에 붙여주던 읍(고을)의 호칭.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영숙 (숭의여자고등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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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와 군(君)을 봉작할 때 앞에 붙여주던 읍(고을)의 호칭.

내용

외명부 중에 왕비의 어머니, 왕세자의 딸, 2품 이상의 종친 부인들에게 봉작 앞에 본인의 본관(本貫 : 貫鄕)이나 남편의 본관, 기타 연고지 등의 읍호를 붙여주었다. 읍은 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소재지를 말한다. 왕비의 경우 책봉이 결정되면 연고가 있는 고을의 행정 단위를 승격시키는 은전을 베풀었는데, 전대에서부터 계속된 관행이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경우 내향(內鄕 : 아버지의 고향)인 원평부(原平府)를 파주목(坡州牧)으로, 외향(外鄕 : 어머니의 고향)인 인천군(仁川郡)을 도호부로 각각 승격시켰다. 이러한 연고지의 승격은 왕비에만 국한된 것으로 빈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왕비에 대한 예우는 가족까지 확대되었다. 왕비의 아버지는 정1품 부원군(府院君), 어머니는 정1품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지고, 봉작 앞에 연고지의 읍호가 가해졌다.

예를 들면, 숙종 때 희빈장씨(禧嬪張氏)를 비에 봉하면서 아버지 장형(張炯)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어머니 고씨(高氏)를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 계모 윤씨(尹氏)를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에 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희빈 장씨가 다시 빈으로 강등되면서 부모의 직첩이 국가에서 회수당하였다.

외명부의 봉작 및 읍호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서얼출신이나 재혼한 여성에게는 봉작하지 않았으며, 이미 봉작을 받은 뒤라도 재혼한 자는 국가에서 직첩을 회수하였다. 군을 봉작한 경우도 이와 같았다.

왕비의 아버지와 2품 이상의 종친, 공신 등에게도 군을 봉작한 뒤 읍호를 첨가시켜주었다. 그 밖에 3품 이하 종친과 의빈(儀賓 : 공주와 옹주의 남편)도 아울러 읍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읍호는 조선 후기에 와서 외명부 중 종친은 대군과 왕자군의 부인까지만 사용할 수 있도록 더욱 제한하였고, 정1품에서 종1품까지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 『세조실록(世祖實錄)』

  • - 『숙종실록(肅宗實錄)』

  • - 『경국대전(經國大典)』

  • -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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