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原詞)는 전하지 않으며, 제목과 전하는 이야기와 평(評)이 『고려사(高麗史)』 권71 악지(樂志) 삼국속악(三國俗樂) 신라조에 전하고, 그 내용이 축약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 악고(樂考) 17에 옮겨져 있다.
『고려사』에 실린 제목은 ‘이견대(利見臺)’이며, 『증보문헌비고』에는 ‘이견대가’로 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와 평을 살펴보면 “신라왕의 부자는 헤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상봉하게 되자 대(臺)를 쌓아서 부자상봉의 기쁨을 다하고 「이견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왕의 부자가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 이웃나라에 나가서 회동(會同)하였는지도 모르겠고, 혹 인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평을 더하고 있다.
『고려사』의 「이견대」에 의하면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한 곳이며,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함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의 “후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의 이름이 이견대”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그 기념으로 이견대를 축조하고 682년에 「이견대」를 지었다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