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인릉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고, 1873년 우승지, 1874년 예상승지, 1874년 성균관 대사성, 1875년 승정원 좌승지 등의 경직을 역임하였다. 1876년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되어 운요호사건으로 전몰한 자들을 위해 충렬사(忠烈祠)에 제사지내는 것에 사민(士民)과 병사를 같이 제사지낼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장곶첨사(長串僉使) 정동주(鄭東周)의 비리와 최순원(崔順元)·유동원(劉東源)의 선행상신 및 조호영(曺鎬永)의 일만냥의 보납(補納)에 대한 상신보고를 하는 활동을 보였다. 1880년에는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1883년에는 통리군국기무아문 협판군국사무로서 형무일을 보다가 이용사(利用司)에서 근무하였다.
갑신정변시에는 승정원 도승지로서 주모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1884년 의정부 유사당상, 이듬해 호군(護軍), 공조판서, 선혜청 제조, 총리내무부 협판내무부사로서 농무국의 업무를 보기도 하였고, 예조판서,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 1889년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 제조(提調), 자경전(慈慶殿) 상량서사관(上樑書寫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