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서로(瑞老). 평성군(枰城君) 이위(李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신군(義新君) 이징원(李澄源)이다. 아버지는 이유언(李幼彦)이며, 어머니는 홍이평(洪以平)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1554년(명종 9) 주세붕(周世鵬)이 자식없이 가난하게 죽자, 상가가 영남지역까지 먼 길을 장사지내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건의하여 호송토록 일을 추진하였다. 이듬해에는 병을 핑계로 사직, 낙향한 이황(李滉)의 재등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1555년부터 저작·박사·부수찬·병조좌랑을 역임하는 동안 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 등과 함께 소윤의 윤원형(尹元衡) 심복이었던 윤춘년(尹春年)을 섬겨 붕당을 이루며 권세를 잡았다.
그러나 1557년(명종 12) 윤원형이 자기를 배척함을 분하게 여겨, 허물을 모아 죄로 얽어서 파직 및 귀양가게 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계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되자 재등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