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에 이를 때가지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된 뒤 곧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 해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 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 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지냈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 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에는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 祭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이 時政에 대해 적어 보관하던 곳)의 북쪽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다.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