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 때 강릉 남대천 남쪽 광정리에 내외향교(內外鄕校)가 있었으나 소실되자, 1313년(충선왕 5) 강원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 김승인(金承印)이 화부산 연적암(硯滴巖) 아래에 항교를 설립하였다. 1411년 화재로 다시 불타 버리자 강릉대도호부 판관(判官) 이맹상(李孟常)과 강릉 유생 68인이 발의하여 1413년에 중건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을 비롯한 향교 전반에 대한 중수가 있었으며, 1738년(영조 14) 정양재(正養齋)를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번 중수와 중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9년 향교 재정으로 신식 학교인 화산학교(花山學校)를 설립 · 운영하다가 1910년 폐교되었고, 1928년 개교한 강릉공립농업학교를 비롯하여 강릉 시내에 설립된 학교들 대부분은 교사가 완공되기 전 명륜당을 교사로 활용하면서 개교하였다.
대성전은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또 명륜당과 동무(東廡) · 서무(西廡) · 전랑(前廊)은 2020년 12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가문화유산 외의 건물과 구역은 1985년 1월 17일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릉향교는 화부산 아래 경사진 곳에 정남향으로 위치하며, 위쪽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 아래쪽에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을 배치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통로인 회랑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과 10철 및 송조 6현의 위패가, 동무와 서무에는 중국 97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은 2층 누대 형식으로 아래층은 원형의 기둥만 세우고 벽을 쌓지 않았으며, 위층에는 마루 바닥의 강당과 직실(直室)이 있다.
1614년(광해군 6) 강릉부사 정경세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 상제례 간소화 등을 위해 「통유문급절목(通諭文及節目)」을 시행하였고, 1622년(광해군 14) 원장 이상혐 등은 절목의 철저한 시행을 위해 친속상간한 자는 관에 알리고 군역에 종사하게 할 것, 내외자손 중 난간(亂奸)한 소생은 과거 응시를 불허할 것 등의 금문(禁文)을 발표하였다.
1791년(정조 15) 조정은 해폐(海弊) 해소 방안으로 강릉향교 석전제의 제수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하여 건어[어숙(魚鱐)]를 70% 줄이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강릉 유생들은 지역적 특성과 『국조오례의』에 제수의 수량이 정해지지 않은 점 등을 주장하면서 관찰사에게 항의하는 한편, 경향 유림들에게 처분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또한 체포된 주동자를 탈취하여 향교에 숨기고, 상경 상소를 추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상경 유생들을 검거하여 강원도 감영으로 압송하였고, 강릉에 파견된 안핵어사(按覈御史)의 조사에 따라 주도 유생들은 유배되었으며, 신문 중 유생이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고, 강릉부사 이집두도 속전의 처벌을 받았다.
또 하남재(河南齋)의 서원화 추진 시비, 오봉서원(五峯書院) 우암(尤庵) 영정 추배 시비 등 향론의 분열이 발생할 때마다 재회를 통해 조정하였으며, 19세기에는 신 · 구유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신구유통행절목(新舊儒通行節目)」과 「향교전답이정절목(鄕校田畓釐正節目)」 등을 시행하였다.
현재 매년 봄 · 가을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고 있으며, 강릉 시민을 대상으로 한문 강독, 전통문화 특강 등을 진행하고 있다. 향교 조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 명, 그리고 향교의 행정 및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약간명을 두고 있다. 소장 전적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공자의 행적을 도해한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 등 70여 권만 남아 있다.
강릉향교는 다른 지방 향교 설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전국 향교 설립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또한 건물 구조, 춘추로 거행하는 석전제 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 및 전승되고 있는 점에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향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