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2년(효종 3) 대성전 위패를 도난당한 ‘위패 투실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인해 흥양 유생 정석 · 김기추가 서울로 잡혀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1695년(숙종 21) 현인 강익무(姜翊武) · 치무(致武) 형제가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 · 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신사년(1701) 옛 자리[현재 자리]에 중건되었다. 재수(齋首) 1인,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이 있었다.
사마재((司馬齋) 유무 흔적은 찾아지지 않지만, 1817년(순조 17) 현감 유민검이 양사재(養士齋)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현감 신의학이 동재 · 서재와 명륜당의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828년 현감 조존승과 이광문 · 송석흠 등의 노력으로 대성전(大成殿)이 중수되었다.
갑오 · 광무개혁을 거치면서 향교 재원이 전체적으로 약화되는 가운데 흥양향교는 신학교에 토지 주1을 기부하여 춘추 석전제와 건물 보수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송인섭(宋仁燮), 신재구(申在求), 유중홍(柳重洪) 등 유림들은 재원 조달을 위해 1913년 존성계(尊聖契)를 조직하였다. 207인으로 출발한 계원이 1919년에는 2,005인으로 증가했고, 계원으로부터 2냥씩을 거두어 400냥을 본전으로 삼아 이식을 하여 토지를 매입하였다. 『흥양지』(1926)에 향교전답 51,545평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흥양군에서 고흥군으로 군호(郡號)가 개칭되면서 향교 이름도 ‘고흥향교’로 변경되었다. 1985년 2월 25일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 현존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 서무, 동재 · 서재, 양사재, 유림회관 등이 있다.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봄 · 가을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하고 있으며, 전교 1인과 장의 수명이 관리하며 충효 선양과 예절 교육 및 효자 · 효부 발굴 등을 하고 있다.
고흥 유림은 일제강점기에 자신들의 세력과 전통 질서를 고수하는 데에 향교 존성계를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