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1865년 식년시의 생원에 합격한 뒤 1873년 동몽교관(童蒙敎官), 1879년 아산현감, 1880년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시의 문과에 합격하여 부수찬이 되었고, 1894년 탁지아문참의(度支衙門參議), 1900년 중추원의관·한성재판소판사를 거쳐 1901년 비서원승·궁내부특진관·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었으며, 이듬해 영선사장(營繕司長)을 역임하였다.
1903년부터 외직을 맡아 경상북도관찰사·전라남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경기도관찰사 재임시에 시흥민란이 발발하여 관아가 습격을 받아 시흥군수 박우양(朴嵎陽)이 피살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그 사후처리를 잘 마무리하였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을 거쳐 의효전제조(懿孝殿提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