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에 선파(璿派) 유생으로서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敎), 사간원 헌납(獻納)과 집의(執義)를 맡았다. 이듬 해 홍문관 전한(典翰)과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에 올랐다.
1867년에 명릉선릉친제(明陵璿陵親祭) 때 집례(執禮)일을 보았다. 1871년에는 정주목사(定州牧使)로서 평안도지역의 수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위유사(慰諭使)에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879년에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의, 1882년 승정원 부승지,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에는 친상책보(親上冊寶) 때 대거승지(對擧承旨)와 별시초시(別試初試) 1소시관(一所試官)이 되었다. 1892년에는 의화군(義和君) 관례(冠禮) 때 주인으로서 종정경(宗正卿)과 추상가상존호책보(追上加上尊號冊寶) 때 독금보관(讀金寶官), 이조참판을 지냈다.
1893년 사헌부 대사헌, 1896년 종2품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3등, 이듬 해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2등, 봉상사 제조(奉常司 提調) 칙임관 4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에는 영선사장(營繕司長)으로서 궁내부특진관 칙임관 4등과 선원속보교종당상(璿源續譜校正堂上), 옥책금보관(玉冊金寶官)으로서 많은 일을 하였다.
1890년에 장예원경(掌禮院卿)과 정2품으로서 태의원경(太醫院卿) 칙임관 3등이 되었다. 1901년에는 비서원경(秘書院卿) 칙임관 3등, 이듬해 시종원경(侍從院卿) 칙임관 3등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각 왕릉의 위토전답(位土田畓) 관리에 철저할 것을 주청했으며, 숭의묘(崇義廟) 상량서사관(上樑書寫官) 일을 보았다.
이듬해 궁내부특진관 칙임관 2등에 올랐다. 1905년에는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강력한 처단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칙임관 2등이 되었고, 조병세(趙秉世)와 민영환(閔泳煥)에 대해 조정에서 특별장례를 치러 주도록 주청하였다.